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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명원 Jul 04. 2023

순옥님

텃밭일지 22

  

“상추 뜯었는데 좀 주고 갈게요.”

순옥님의 말에 순간 당황했다. 상추라면 이미 냉장고에도 한 봉지가득 있다. 손바닥만 한 텃밭을 가꾸는 초보 텃밭 지기에게도 가장 만만한 것은 상추였다. 텃밭에 심어둔 상추는 돌아서면 자라있고, 뜯어내면 또 밤사이에 자라있었다. 처음엔 신기해하던 가족들도 이제 상추를 내놓으면 “또…?” 하며 체념하는 얼굴이다. 이런 판국에 또 상추라니 이를 어쩐다. 하지만 난감해하는 마음속과 달리 입에선 엉뚱한 말이 튀어나왔다.

“어머, 순옥님! 마침 상추 사려고 하던 참이었어요. 주시면 감사하게 먹을게요.”     


순옥님은 무학으로 한글을 제대로 깨우치지 못하고 칠십이 되었다. 나에게 반년간 한글을 배웠는데 처음엔 단어를, 그 이후엔 짧고 쉬운 문장들을 받아쓰기했다. 

“내 것으로 이런 물건 처음 가져봐요.”

첫 수업에 나온 그녀는 새로 산 필통 속에 가지런히 필기구를 넣어왔다. 쉬는 시간도 없이 받아쓰기하며 즐거워했다. 배우는 사람은 배우는 즐거움에 하나도 피곤하지 않지만, 가르치는 사람에게 미안해서 어쩌냐고 그녀는 늘 말했다. 

“선생님, 정말 복 받을 거예요.”

순옥님이 내게 가장 많이 하는 말 중 하나는 이것이다. 나는 그때마다 부끄러워졌다. 나는 그녀에게 돈을 받고 가르치는 것이다. 그런데도 그녀는 늘 내게 고맙다고 했다.      


얼마 전부터는 수업하던 장소를 이용할 수 없게 되었고, 요양보호사로 일하는 그녀는 오전에 시간을 낼 수 없었다. 마지막 수업에 순옥님은 ‘제대로 밥 한 끼를 대접해야 하는데….’라며 부끄러운 얼굴로 사 온 떡볶이를 내밀었다. 이미 저녁밥을 먹은 나는 배가 터질 것 같았지만 ‘마침 저녁을 안 먹었다’라며 그 떡볶이를 첫 끼니인 듯 맛있게 먹었다. 순옥님은 흐뭇한 얼굴로 자꾸 내 앞에 떡볶이를 밀어놓았다.     

더는 대면 수업을 할 수 없었지만, 한글 수업에 대한 그녀의 열정을 알게 된 나는 그녀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순옥님! 매일 일기를 써서 화요일과 금요일마다 우편함에 노트를 넣어두세요. 제가 빨간펜으로 틀린 것 교정하고 메모해드릴게요.”


이렇게 해서 그녀와 나의 새로운 수업이 시작되었다. 얼굴을 마주하는 것은 아니지만, 일기 속에 담긴 그녀의 하루를 나는 본다. 틀린 단어를 일일이 고치고 짧은 글을 남겨둔다.

“ㅆ 받침 주의하시고, 같은 단어를 여러 번 틀린 것은 따로 표시했어요. 다음엔 틀리시면 안 돼요. 계속 열심히 해주세요.”     

운동 삼아 동네 한 바퀴 걷다가 일기장을 확인하는 일이 크게 어려울 것도 없는데 순옥님은 늘 일기장 끝에 “샘, 고마습니다.”라고 삐뚤빼뚤한 글씨로 써두신다. 가끔은 우편함 속에 과자를 넣어두시기도 한다. 요양보호사로 그녀가 어떤 어려움을 겪고, 얼마나 힘든 하루를 보내는지 나는 이제 안다. 속상하고 화가 나는데, 일기를 쓰고 나면 어디다 화풀이한 것만 같아 편하다는 문장에선 그만 뭉클했다. 빨간 표시가 한 장에 한 개도 없었으면 좋겠다는 문장에선 혼자 웃음이 난다.   

   

그녀의 하루와 그녀의 마음을 알게 되었으니 나는 상추를 가져다주겠다는 말을 차마 거절하지 못했다. 우리 집에도 상추가 많아요, 할 수 없었다. 상추는, 그리고 그 상추를 주는 것은 그녀의 마음을 표현하는 방식일 테니 말이다.

누군가의 마음을 거절하는 것 못지않게, 받아들이는 데에도 요령과 예의가 필요하다. 그뿐만 아니라 내 마음을 전하는 일도 쉽기만 한 것은 아니다. 누군가에게 내 마음을 제대로 전하는 일엔 용기마저도 필요한 순간이 있다. 

내가 순옥님의 마음을 받을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이 반드시 내 마음을 남에게 잘 전달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은 아니다. 마음을 건네는 일은 너무 늦어도, 빨라도 안된다. 주는 이나 받는 이나 부담스러운 크기여도 곤란하다. 그 적절한 때와 적당한 요령을 나는 아직 알지 못한다. 다만 상추를 주고받듯 누군가와 마음을 주고받는 순간의 따뜻함이 주는 행복이 어떤 것인지는 어렴풋이 알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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