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전명원 Jul 08. 2023

농부의 마음

텃밭일지 24

 

“재미있죠?”

텃밭에 물을 주고 있을 때 뒤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웃인 그분은 나를 보며 웃었다. 상추를 뜯어줄 테니 좀 가져가시라는 말에 이미 넉넉하게 있다며 손을 내저었다.

“나는 어려서 시골에서 자랐잖아요. 이런 거 하나도 안 재밌어요, 지겹기만 하지. 그런데 상추가 정말 예쁘게 자랐네요. ”

나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뿌듯한 마음에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내가 이런 것도 키울 줄 아는 사람이에요’라는 맘이 아니라 ‘우리 애 이쁘죠’하는 맘이 먼저 드는 팔불출 초보 텃밭 농부인 탓이다.      


사실 나는 화분만 들여놓으면 다 죽이는 사람이었다. 생화를 받으면 며칠 못 볼 것인데 아깝다는 말을, 나는 화분을 두고 했다. 그것은 엄마도 마찬가지여서 어려서부터 우리 집엔 화분이 없었다. 어쩌다 가끔은 리본을 몸에 두른 난 화분을 아빠가 집으로 가져오신 적도 있었지만, 매번 얼마 못 버티고 그것들은 말라버렸다. 너무 물을 자주 주어서, 혹은 깜빡잊고 주지 않아서 그들은 마르거나 썩었다. 그뿐만 아니라 진딧물이 생기거나 몸살을 앓다 죽기도 했는데 식물의 일을 알 수 없으니 매번 화분이 죽을 때마다 엄마는 아빠에게 말했다. 

“다시는 화분 같은 거 얻어오지 말아요.”     


엄마를 닮아 화분마다 오래 키우지 못하던 내가 이제 화분을 죽이지 않게 된 것은 지금 살고 있는 집에 이사 오면서부터의 일이다. 남향이라 볕이 잘 들어서인가 싶었지만 생각해보니 남향집에 처음 살고 있는 것도 아니다. 

“너무 과한 애정을 쏟지 말고, 적당히 너 본 듯 나본 듯하면서 키워야 해요.”

화분을 잘 키우는 사람이 내게 해준 조언이었다. 스투키가 이쁘게 자라서, 동백이 푸르고 반짝이는 잎을 가지고 있어서, 철쭉이 봄이면 하늘하늘한 흰 꽃을 피워내는 게 이뻐서 나는 자꾸 물을 주고 싶어졌는데 그때마다 그의 조언을 생각하며 참았다.     


더는 화분을 죽이지 않고, 심지어 혼자서 분갈이도 하게 된 나는 내친김에 초보텃밭러가 되어 손바닥만 한 작은 텃밭에서의 놀이를 즐긴다. 바람의 온도가 부쩍 따뜻해지던 지난 어느 봄날에 여러 가지 모종을 사다 심었다. 그 이후 매일 텃밭에 나가 나의 채소들을 들여다보며 흐뭇한 눈길로 바라보는 것은 내 오후의 일과가 됐다.      

텃밭의 채소도 식물이다. 여전히 식물의 언어를 이해할 수는 없고, 애정만 넘치는 이런 나에게 지나가는 할머니가 내게 한 말쯤 해주신 일이 있다.

“처음에 모종 심고는 매일 물을 주지만 적당히 자라서 뿌리를 땅속에 튼튼히 박았을 무렵부터는 이삼일에 한 번씩 주어도 돼요. 아주 가문 한여름 아니면 너무 자주 주어도 뿌리가 썩어요.”

맑고 차가운 물을 뿌려주며 혼자 어깨를 으쓱하고 있던 나는 텃밭에 서서 오래 그 할머니의 말씀을 생각했다. 잠시 잊고 있던 ‘거리두기의 법칙’이 떠올랐다. 화분을 너무 사랑하면 죽이게 된다는 말, 적당히 떨어져서 바라볼 줄 알아야 오래 볼 수 있다는 말. 왜 나는 화분과 텃밭은 다르다고만 생각했을까. 작은 화분의 일과 노지에 펼쳐진 텃밭의 일은 역시 식물의 일이므로 다를 것이 없구나 하는 마음이 그제야 들었다.   

  

나의 넘치는 사랑과 애써 힘들게 떨어져 바라보는 눈길을 받으며 텃밭 채소들은 무럭무럭 자라났다. 적당한 습기가 있는 날은 건너뛰고, 바삭하게 건조한 날이 이어질 때는 해가 서서히 꼬리를 감추는 저녁이면 물을 뿌려주었다.

내가 기른 채소를 먹는 신기함과 즐거움 못지않게 주변 지인들에게 상추를 나눠줄 때의 기쁨도 컸다. 그날 밭에서 따온 상춧잎을 나눌 때, 나는 선물하는 마음이 된다. 선물은 받는 사람만 즐거운 것이 아니다. 의무감으로 어쩔 수 없이 세금 바치듯 하는 선물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선물이 나와 내 마음을 전한다고 생각하면 그 어떤 선물을 고를 때이든 신중해지고 뿌듯한 마음이 된다. 그러니 상추를 나누는 마음은 역시 선물을 고르는 마음이 되어 좀 더 예쁘고, 싱싱한 것을 담게 된다.      


이제 상추는 대가 손가락 굵기보다 더 두꺼워지고, 잎도 처음처럼 연하지 않다. 더는 새잎이 돋지 않는 것도 있어서 그만 정리해야겠구나 싶어 호미와 새 모종을 들고 나섰다. 한여름에도 모종을 심을 수 있는 것 중 내가 도전할만한 것은 그나마 옥수수, 비트 정도였다. 상추 몇 포기를 뽑아내고 그 자리에 새 모종을 심었다. 한 뼘도 안 되는 모종을 심어두고는 빨리 옥수수가 열리고, 빨간 비트가 땅속에서 단단한 몸을 키웠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우물가에서 숭늉 찾는 격이다.


호미를 든 김에 잡초도 캐내고, 며칠 새 또 무성해진 깻잎도 여러 장 뜯었다. 커다란 이파리 사이 숨어있는 듯 달린 보라색 가지들과 앙증맞은 고추 열매도 확인했다. 이것도 밭일이라고 끄응, 소리를 내며 허리를 펴니 얼굴에서 땀이 흘러내렸다. 등줄기도 축축했다. 한 번에 펴지지 않는 허리를 손으로 두드리며, 감히 혼잣말해본다. 

“아, 진짜 농부의 마음이 이해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