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전명원 Jun 05. 2024

동전의 여행

                                   

요즘 세상에서 동전은 그리 환영받는 존재가 아니다. 지갑에 지폐며 동전을 챙겨가지고 다니던 시절도 있었지만, 이제는 지갑을 들고 나가지 않아도 크게 불편하지 않다. 심지어 아예 현금을 받지 않는 매장도 생겨났다. 신용카드를 사절하고 현금만을 선호하던 날도 있었는데.     


이런 세상이지만 퇴근해 돌아온 남편의 주머니에선 늘 동전 몇 개가 나온다. 지갑은 들고 나가도 막상 지갑속엔 카드 뿐, 현금은 없기 일쑤인 나와달리 남편은 현금을 주로 쓴다. 개인 신용카드도 가지고 있지만, 매달 용돈도 현금으로 받는 걸 더 좋아한다. 대체 어디서 동전이 자꾸나오느냐는 내 말에 주로 편의점에서 담배를 사고 남은 동전이라고 했다.      


이처럼 요즘 보기드문 아날로그형 인간덕에 모인 동전이 꽤 된다. 동전들은 여행지에서 사온 머그컵에 담아두었다. 어느날은 컵 두세개를 채우고 있는 동전들을 물끄러미 보다 생각했다. 동전도 돈인데, 저걸 계속 모아두는게 맞나.

주변 은행점포도 자꾸 없어지고 자동화기기만 남는 세상이다. (자꾸 라테지옥같지만) 예전엔 은행창구에서 동전을 교환해주거나, 아예 교환기가 설치되어 있기도 했었다. 언젠가부터 동전은 처치곤란에, 홀대받는 천덕꾸러기가 된 느낌이다.     


컵 세 개에 동전을 분류했다. 500원짜리, 100원짜리, 그리고 50원과 10원짜리를 한데 넣었다. 100원짜리 동전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이것을 어찌 소진해야하는지 궁리하기 시작했다. 

편의점에서 쓰레기봉투 하나를 사고 백원짜리 여덟 개를 냈다. 500원이라면 좀 덜하지만 100원짜리라면 사정이 다르다. 요즘 편의점 알바생들은 마감하기 나쁘니 오히려 현금을 싫어한다던데 거기다가 동전 여덟 개를 투척하는 것은 아무래도 미안한 일이었다.     


혼자서 컵에 가득 담긴 동전들을 만지작 거리다가 하나씩 들여다보았다. 1980년대부터 작년까지 다양한 연도의 동전들이 섞여있었다. 그러다 문득 2008년의 동전을 떠올렸다. 그 동전들은 지금 어디를 떠돌고 있을까.     

2008년이 내 인생에서 특별한 추억이 있는 해는 아니었다. 딱히 잊어버리고 털어내고픈 기억들로 남은 해도 아니었다. 그것은 굉장히 즉흥적인 생각이었는데, 그때에도 동전들을 보다가 그 해의 동전을 기념으로 갖고 싶다는 마음이 갑자기 들었다. 뭐든 찾고자 하면 찾아진다지만 그 흔한 동전은 달랐다. 막상 2008년의 동전을 찾으려하니 맘처럼 쉽지 않았다.

결국 은행에 다니는 지인에게 그 해의 동전을 구할수 있는가 물었더니, 그는 허무할만큼 쉽게 새 동전을 구해다 주었다. 50개의 100원짜리 동전이 종이로 단단히 말린 한 묶음이었다. 제일 윗부분에 드러난 반짝이는 2008년 숫자를 한동안 바라보다 서랍속에 잘 넣어두었다. 2008년의 시간을 고스란히 보관하는 기분이었다.     

사실 그리 막역하지도 않은 사이에 그런 부탁을 할 정도로 2008년이 내게 특별한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신기한 건, 한 순간의 즉흥적인 치기로 2008년의 동전을 손에 쥐고나니 갑자기 그 해가 특별해져버린 기분이 들기도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특별해진 2008년, 그 해의 동전을 아직도 가지고 있느냐 묻는다면 대답이전에 우선 멋쩍게 웃어야겠다.      


여러해가 지난 뒤 서랍을 정리하다가 잊고 있던 그것을 발견했다. 2008년에 발행된 100원짜리 새 동전 50개. 

나는 사실 일년이상 쓰지 않는 물건이며 옷을 가지고 있지 못하는 사람이다. 쓰지 않는 것들은 버리거나, 주변에 나눠주며 정리한다. 이런 사람에게 몇 년간 그 존재를 잊고 있던 2008년 동전은 더 이상 특별하지 않았다. 그 해의 치기어린 감정은 사라진지 오래이니까 한때 ‘2008년’이었던 그것은 이제 그저 ‘2008년도 동전’일뿐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정리대상목록’에 올랐다.     


동전꾸러미를 만지작거리다가 강원도로 낚시가는 길에 챙겨넣었다. 새벽낚시를 잠깐 하고는 시골 작은 슈퍼에 들어가 그 동전묶음을 뜯어 맥주 한 캔과 음료수를 사마셨다. 그리곤 한여름의 푸른 조팝나무 그늘아래 차를 대놓은 채 음악을 들으며 하루종일 자다깨다를 반복했다. 어스름이 내리는 계곡을 벗어나 천천히 집으로 돌아오며 내가 뜯어 내놓은 2008년도 동전 50개를 생각했다. 그 동전들이 흩어져 어떤 것은 더 깊은 산골마을로, 어떤 것은 백두대간 고개를 넘어 파도소리 철썩이는 바닷가 마을로, 그리고 또 어떤 것은 난데없이 붐비는 서울 한복판 어디쯤에서 또 다시 누군가의 손에 쥐어지는 순간을 상상했다.     


남편의 호주머니에서 나와 하나둘 컵에 모인 동전들을 만지작거리며 그날 내 손을 떠난 동전들을 생각했다. 반짝반짝한 새동전이던 그것들은 오랜 세월이 흘렀으니 빛바래고, 닳고, 찌그러지기도 했을 것이다. 혹시나 싶어 컵속의 동전을 뒤져봤는데 2008년의 것은 없었다. 설령 있었다한들 그날의 동전을 내가 알아볼리는 없겠지만.     


짤랑짤랑 소리를 내는 백원짜리를 한주먹 쥐고 햇볕이 따가운 집밖으로 나섰다. 오래전 강원도 계곡에서의 그날처럼 정수리에 꽂히는 햇살의 온도를 느끼며 천천히 지하철역으로 걸었다. 그리고 자판기에 100원짜리 동전 스물두개를 넣고 음료수 2병을 사서 돌아왔다. 여름으로 가는 햇살은 여전히 따갑고, 이명처럼 자판기속으로 떨어지던 동전소리가 따라왔다. 또다른 여행을 떠날 나의 동전들과 거기에 실어보낸 오늘의 나를 생각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의 에너지가 오는 곳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