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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명원 Jun 21. 2024

스며들거나, 혹은 익숙해지거나

                        스며들거나, 혹은 익숙해지거나          


문을 열고 들어서자 마치 숲속으로 순간이동 한 듯 진한 나무 냄새가 확 다가왔다. 공장 같기도, 카페 같기도 한 그곳 안엔 막상 푸른 나무는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안을 채운 모든 것이 나무이기도 했다. 그것도 페인트칠하거나 곱게 꾸민 것이 아닌 ‘목재’ 그대로의 나무들.

목재회사의 공장이었던 곳을 카페로 바꾼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고, 이웃한 건물에선 여전히 우드 슬랩 전시와 판매도 한다. 들어서면 확 밀려드는 나무 향기가 좋아서 한동안 코를 킁킁거렸다. 이런 공간에서라면 다른 그 어떤 방향제도 필요 없겠다.     


바닥과 벽면을 가득 채운 목재들. 나뭇조각들을 이어붙여 만든 테이블과 의자. 그리고 판매용으로 내어놓은 쟁반과 도마 등 모든 것이 나무인 곳. 가뜩이나 나무 질감과 향기를 좋아하는 나는 이런 독특한 컨셉의 카페가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한동안 앉아 있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인가 나무 향기는 아주 희미해져서 더는 느끼기 힘들었다. 사방은 나무 그대로이니 그 향이 사라졌을 리는 없는데 그렇다면 나는 스며든 걸까, 아니면 익숙해진 걸까. 그 어느 쪽이든 이처럼 더는 향기가 느껴지지 않게 되는 일을 생각했다. 

살다 보면 이런 일은 많다. 새로운 건 더 이상 새롭지 않고, 낯선 것은 더 이상 낯설지 않아지는 순간들이 온다. 그건 좋은 일일까 아니면 서글픈 일일까.     


가까운 이웃은 얼마 전 딸의 가족이 모두 미국으로 떠났다. 아들 역시 이미 그 나라에 살고 있으므로 장성한 자식들을 모두 지구 반대편에 두게 된 것이다. 나는 아직 결혼하지 않은 딸이 함께 살고 있지만 유일한 피붙이인 언니가 역시 먼 나라에 떨어져 살고 있으니 구구절절 내보이지 않는 그 이웃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여러 해 전 부모님이 연달아 돌아가시고, 장례 후 머무르던 언니마저 미국으로 돌아가고 나서야 나는 뒤늦게 그 부재(不在)라는 현실을 마주했었다. 그때의 감정은 서운함, 슬픔…. 그것 말고도 하나가 아닌 여러 가지였겠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 모두는 결국 ‘두려움’이 아니었을까 싶다.      


떠날 준비에 바쁜 딸의 가족 이야기를 하는 이웃을 볼 때, 떠나고 남겨진 짐들을 정리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 그리고 아이들이 원하는 좋은 일과 삶의 자리를 찾아갔으니 마음만은 더할 나위 없이 편하다고 말하는 이웃의 표정을 볼 때 나는 오래전의 내가 생각났다. 모두 떠나고 나만 남겨진 것 같은 기분, 떠난 이들의 안녕을 비는 기원, 그리고 어쩔 수 없이 따라오던 두려움의 시간. 그건 내가 필요로 하는 어떤 순간에 나를 잡아줄 손은 너무 멀리 있다는 막막함뒤에 오는 것이기도 했다.


물론 이웃과 내가 맞이한 부재(不在)의 시간이 같지 않으니 그 마음 역시 같을 리는 없다. 그때의 나와 달리 이웃은 그리운 자식들을 언제든 만날 수 있고, 매일 목소리를 들을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그에게도 역시 ‘두려움’의 시간이 왜 없겠는가.     

시간은 약이라는 말을 한다. 빈자리는 다시 메꿔지고, 아픈 마음엔 새살이 돋는다. 그런 것이 시간이다. 세월이 지나면 익숙해지고, 나아지고, 적응하게 된다. 상실과 부재의 시간을 건너 지금을 살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진한 나무 향기 속에서 커피를 마시며 남편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제 우리 아이는 따라다닐 나이가 한참 지났지”라고 하면, “우린 그때 이미 학부모였는걸” 했다. “언젠가는 결혼해서 우리 곁을 떠나겠지”라는 말엔, “너무 멀리 가면 서운할 것 같아”하는 식이었다. “시간이 너무 빨라”라고 했더니, “미루지 말고 지금 하고 싶은 걸 합시다”라고 받았다.

그렇게 사는 이야기, 시간이 너무 빠르다는 이야기를 나누다 문득 깨달았다. 언젠가부터 더 이상 나무 냄새가 나지 않았다. 

“이제 나무 냄새가 나지 않아”라고 했더니, “계속 이 안에서 있어서 못 느끼는 거야”라는 당연한 대답이 돌아왔다.     


목재공장을 그대로 살려 마치 나무를 쌓아둔 창고 안에 카페가 들어앉은 것 같은 실내였다.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밖으로 나서니 어두운 안과 달리 쏟아지는 햇살에 한동안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었다. 카페에 처음 들어설 땐 굉장한 나무 냄새가 밀려들었지만, 다시 나왔을 땐 안과 밖의 다른 향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시간이 약이라는 말은 어쩌면 이렇게 향기를 더 이상 느끼지 못하는 것과도 비슷한 것인지 모르겠다. 여전히 공간 안에 나무 냄새는 가득할 텐데 한참 앉아있으니 더 이상 그 냄새는 느낄 수 없었다. 없어진 것이 아니고, 사라진 것이 아니다. 그건 익숙해진다는 것이고, 스며든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살면서 겪는 상실과 부재 역시 그럴지 모른다. 그 어떤 것도 헤어지지 않고, 없어지지 않는다. 여전히 함께 있으니 앞으로도 두렵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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