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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릿느릿 아줌마와 나무늘보
Mar 19. 2023
기억을 쫒는 연체동물 -
5. 사과(Apology)
마곡사에 도착하자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11월의 눈. 눈은 이른 봄날의 변덕스러운 바람에 떨어지는 벚꽃잎처럼 흩날리다 이내 그쳤지만 단풍이 빨갛게 물든 마곡사에서 만난 하얀 눈발은 전혀 다른 두 세계가 아주 짧은 순간 하나로 조우하는 듯한 환상적인 느낌을 주었다. 뜻하지 않은 눈발에 기온이 뚝 떨어지자 그가 외투를 벗어 어깨에 걸쳐주고 내가 입고 있던 얇은 카디건을 대신 걸쳐 입었다. 아무 일도 아닌 양 무심한 표정으로. 뜨겁게 달궈진 오븐에서 막 꺼낸 폭신폭신한 빵처럼. 한입 물면 바사삭 부서질 듯 장난스러운 웃음으로. 나는 조금 큰 듯한 그의 옷 속에서 그의 체온을 느끼며 이른 가을, 단풍이 깊이 물든 마곡사 북원의 대웅보전을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마곡사는 책을 통해 본 것만큼이나, 아니 사실 그 이상으로 감동을 주는 사찰이었다. 여름의 모습이 담겨 있는 여행 서적의 사진 보다 가을 단풍이 더 깊은 감동을 주는 곳이었다. 절터를 돌아보면서 우리는 수덕사 이후로 만난 사찰의 모습에 자연스럽게 매료되었다. 오층탑을 지나 대웅보전에 이르자 잠시 발걸음을 멈추어 대웅보전 안에서 흘러나오는 향내음을 맡으며 기단에 조용히 걸터앉았다. 오후의 한산함이, 절에서만 느낄 수 있는 그 고요함이, 나와 그의 주위에 맴돌았다. 우리는 서로 손을 포개며 바쁜 듯 한번 훑고 지나간 차가운 가을 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처마 밑에 매달린 풍경이 바람결에 흔들리며 주위에 공명음을 울렸다. 차가운 바람과 맑은 풍경 소리, 나는 내 손끝에 닿는 그의 손을 느끼며 살며시 눈을 감았다.
“오빠가 어제 여관에서 물어봤었지? 우리 술 마시면서. 왜 그때 파란 방에서 나갔었느냐고, 그리고 오빠가 어처구니없는 가출을 한 뒤에 성수동에서 혼자 방을 얻어 살았을 무렵에도 왜 또 한 번 오빠 곁을 떠났었냐고.”
“….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까, 글쎄…. 왜 그랬을까. 이렇게 오빠를 사랑하는데 내가 왜 떠나 버렸을까. 처음엔, 파란 방의 나는…. 굳이 어렵게 설명할 필요 없이 그땐 내가 너무 어렸다는 것을 오빠도 알고 있었는지. 겉으로 보이는 나의 어른스러움과는 달리 난 아직 자기감정 하나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어린 사람이었어. 두려움도 많았지. 그건 성수동에서 오빠와 함께 지내는 동안에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아…. 파란 방에서 지냈을 때는 오빠가 하고 있는 사랑을 방해할 자신도 없었고 내 사랑을 포기할 자신도 없었어. 나 때문에 헤어질 만큼 오빠와 그 사람의 관계가 가볍지 않았던 것도… 알고 있었거든. 그런데 마음이 마음대로 되지 않았어."
“듣고 있어?” 나는 앞을 응시하며 그에게 고백하듯 얘기했다.
“응. 듣고 있어”
고요한 바람이 우리 주위를 맴돌았고 그와 나의 어깨가 닿았다.
" 어느 날 그런 생각이 들었어. 우린 서로를 선택할 만큼 서로 미묘한 감정이, 절실함이 부족한 건 아닐까. 우리 사이가 절실하다면 이런 상황에서 서로의 연인에게 충실할 수 있을까? 가을이 시작될 무렵,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아. 마일즈 데이비스의 Autumn Leaves를 들으면서. 파란 방을 떠날 때. 그때 우리 둘 다 바보였어.. 그렇지? 자기감정조차 알아차리지 못하는…."
“성수동에서는...." 나는 그때의 기억을 다시 떠올리느라 잠시 말을 멈췄다.
"성수동에서 오빠와 지냈을 때는 한없이 좋았어. 마치 가난한 주말부부가 된 느낌이었어. 나는 지방에 사는 아내고 오빠는 서울에서 회사를 다니는 남편이어서 그렇게 주말마다 내가 오빠의 자취방으로 가서 반찬도 해주고 밥도 같이 먹고 영화도 같이 보고 서로 몸을 부대끼고. 그 모두가. 무엇보다 우리가 좋아하는 음악과 책들로 둘러싸여 살 수 있었던 게. 돈은 없어도 한없이 만족스러운 그런 신혼부부 같았어. 하지만 그런 느낌도 내가 오빠 곁을 떠나고 나서야 알았어. 참 바보 같지? 그때도 뭐가 그렇게 두려웠는지 모르겠어. 이별이 두려웠던 건지 아니면 우리가 함께 있는 게 사랑이라는 감정이 아닌 다른 이유라면 어떻게 하나 하는 사실이 두려웠던 건지. 단지 자기 안에 있는 엄청난 공백을 채우기 위해 서로를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그런 두려움. 사랑은 그런 이유로 하면 안 된다는 생각. 그런데 오빠를 떠나고 나서 오랜 시간이 흐르고 나니까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어…. 내 안의 무언가가 조금씩 강해지고 성숙해졌지. 그리고 알게 됐어. 물론 지금도 완벽하게는 아니지만 적어도 내 감정을 알아차리지도 못하는 그런 바보 같은 실수는 저지르지 않을 것 같아. 그런데…."
“그런데..?
“그런데 그게… 너무 늦었나 봐. 너무 늦게 그 사실을 깨닫고 너무 늦게 오빠를 찾았어. 파란 방에서와 같은 상황이기만 했어도 똑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기 위해 오빠라는 존재를 놓치지 않을 텐데. 이제 그러기에 오빠는 누군가와 너무 깊은 인연을 맺었고 파란 방의 연체동물은 다시 어딘가로 표류해 가지 않으면 안 되지. 조용히, 단지 어디로 흘러가기만을 기다리면서...."
“오빠 역시 그땐 너무 뭘 몰랐었지?"
그가 대답이라도 하듯 옅은 웃음을 띠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는 너무 어렸고, 오빤 너무 몰랐어. 그렇게 우리 사이엔 언제나 필연적인 시간의 균열이 생겼던 거지. 하지만 그 균열을 알아차렸을 땐 이미 너무 늦어버린 거야. 절대 하나로 만나 지지 않는 엄청난 균열이 우리 앞에 놓여 있어. 우린 서로 반대편에 서서 서로를 쳐다볼 수만 있어. 뼈 없는 연체동물은 시간의 균열 위를 표류하고 멋진 오빠는 연체동물을 가끔 바라보며 웃음 지어주기만 하면 되는 거야. 그럼 되는 거야. 지금으로선, 어쩔 방도도 없으니까. 응? 그렇지?"
나는 얼굴에 웃음을 띤 채 그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하지만 정말 어쩔 도리가 없다는 걸 우리는 둘 다 알고 있었다. 때 이른 계절, 마곡사에 눈이 내린 것과 같이 막으래야 막을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리는 어쩔 수 없는 일을 두고 그것을 바꿀만한 의지를 가진 인물들이 아니었고 어느 누군가의 가슴에 대못을 박을 만큼 강심장을 지닌 인물들은 더더욱 아니었다. 우리 앞에 당장 놓여 있는 소박한 행복을 파괴할만한 사람들이 아니었기에 그에 더한 간절함을 놓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기도 했다. 5년이 지나고 우린 우리 안에 있는 더딤을 충분히 인지할 만큼 성장했지만 그것을 인지했다고 해서 무언가를 파격적으로 바꿀 만큼 열정적인 인물들은 아니었다. 우리의 열정은 그저 우리의 마음속에서만 요동칠 뿐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성질의 것이었다. 우리의 열정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서로가 함께 있을 때만 표출되는 형태의 것이었고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리라고 의심치 않는다. 그러한 사실이 미치도록 싫다 하더라도 단지 그런 방법으로 밖에 다룰 줄 모르는 사람들인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야.”
나는 그 사실을 어딘가에 새겨 넣으려는 듯 반복해서 속삭였다. 어쩔 도리가 없는 일에 대해서는 애써 손을 대면 안 된다는 사실을 충분히 알만큼 내 안의 연체동물은 성장해 있었다. 여전히 겁 많고 스스로를 보호하는데 급급한 어린 유충이었지만 감정이 관계된 일에는 애써 손을 대지 않는 것이 좋다는 사실은 본능적으로 알았다. 결국 시간은 흐른다. 그리고 아마도 그게 무언가 삶에 있어 중요한 단서가 되지 않을까란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한 바퀴만 더 돌고 슬슬 출발할까?”
나는 등 뒤에서 뒷짐을 지며 생각에 잠겨 천천히 걸어오는 그를 향해 미소 지으며 말했다. 시간이 흘러 어딘가에서 삶의 단서가 나온다 하더라도 그와 헤어지는 시간이 임박해 온다는 사실은 아직 받아들이기 싫은 현실이었다. 하지만 말했듯이 어쩔 수 없는 일에 대해서는 우린 그저 서로를 향해 밝게 웃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나마 견디기 조차 힘들어진다. 우리는 천천히 시간을 들여 마곡사를 둘러보고 사진을 찍었다. 온화한 표정의 중년 부부 여행객에게 부탁해 대웅보전의 처마 밑에 앉아 활짝 웃는 표정으로 한 장 찍고 뒤늦게 도착한 어수선한 국사모임 동호회에게 부탁해 단풍이 깊게 물든 영산전의 단풍나무 앞에서 서로 등뒤로 손을 돌려 안은 채 한 장 더 찍었다. 수덕사 대웅전 앞에서 어색한 모습으로 찍은 사진보다는 훨씬 자연스럽기는 했지만 사진 속 우리는 이미 과거가 되어 버린 듯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시간이 지워버린 빛바랜 사진 한 장처럼.
*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날, 우리는 둘 다 녹초가 될 만큼 피곤했다. 카푸치노 한잔의 여유나 담배 한 가치의 위안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깊은 잠이었다. 나로 말하자면 그와 헤어지기 싫다는 간절함보다는 자고 싶은 욕구가 더 강했다. 이러한 잠의 마력은 아주 오래전, 내가 내 존재를 잊고 싶을 무렵 엄습했던 느낌인데, 왜 지금 이 시점에서 나를 덮치고 있는 것일까.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나는 답을 모른다. 집 앞까지 배웅해 준 그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축 쳐진 몸을 끌어내리다시피 차에서 내렸다. 잠깐 망설인 뒤에 그에게 손을 흔들며 가볍게 안녕을 고하자 그 역시 잠깐 주저하더니 나를 보고 피곤한 표정으로 가볍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차 후미등을 켜고 서서히 아파트 입구를 빠져나가는 그를 보며 나는 어둑해진 집 앞 의 시멘트 블록 위에 걸터앉았다. 익숙한 동네의 냄새가 갑자기 견딜 수 없을 만큼 서글프게 느껴졌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녹초가 되어 버린 몸 위로 뜨거운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눈을 떴을 땐 또 다른 하루가 손도 대지 않은 하얀 백지장 같은 모습으로 내 앞에 놓여 있었다. 너무나도 하얀 백지장이라 손도 대고 싶지 않을 만큼 모든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그리하여 난 다시 눈을 감고 깊은 잠의 나락으로 빠져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