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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의 파란 방 -

4. 다시 여름




  그를 다시 만난 것은 -어느 정도 만남을 지속할 만큼 시간을 보냈다는 의미로- 졸업을 앞둔 마지막 학기의 여름이었다. 1년 만이었다. 물론 그전에 그를 한번 만나기는 했었지만 단지 잠깐 시간을 내어 흐지부지 차를 한잔 마신 것이 전부였다. 어째서 차를 흐지부지 마시게 되었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도 그의 아파트에서 나오며 챙기지 못했던 물건을 돌려받기 위해서였거나 아니면 내가 실수로 가져간 그의 물건을 돌려주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이도저도 아니면 단지 서로의 안부가 궁금했던 것뿐이었는지도 모다. 우리는 길어 봐야 한두 시간 정도 만났고 그것이 우리가 지난 1년 동안 가진 만남의 전부였다. 예상했던 대로 나는 졸업 학기 논문 연구로 정신이 없었그 일은 게 조금 벅다.


 연구실에서의 생활은 사실 생각만큼 바쁘지  않았다. 바쁜 일의 연속으로 시간이 흘러간다기보다 기다림이라는 물질로 이루어진 초침이 가끔은 반나절 혹은 이 삼일이라는 시계를 모두 돌아가기를 지루하게 기다리는 식이었다. 내 시간의 단위는 반나절이나 하루, 이틀 때론 일주일 단위로 숭덩숭덩 베어져 나갔지만 그 시간 안에서 기다림이라는 초침은 묵직하게 소용돌이치는 타르 용액을 헤치고 나아갔다. 연구실 생활이 나에게 썩 들어맞는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내가 하는 연구가 흥미로웠다. 잘하면 졸업 논문으로 대학원까지 진학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매력적인 일이라는 생각과 보통의 동기들처럼 졸업 후 취업이라는 선택지 사이에서 고민할 즈음 그가 찾아왔다. 다음 학기가 시작되려면 일주일이 더 남아 있는 시점이었다.


  그는 그의 마티즈에 이불 몇 채와 옷가지들, 그리고 간단한 가구들과 자잘한 가전제품, 밥솥, 커피 포트, 그가 자랑해 마지않는 후지쯔 노트북, 엄청난 양의 재즈 시디와 클래식 시디를 뒷좌석에 실은 채 한여름의 태양이 지루하게 내리쬐는 캠퍼스 정문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아직 여름 방학 때 연구원들에게 주어지는 일주일간의 휴가를 가기 전이었고 그는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집을 나온 상황이었다. 집을 나온 이유는 간단했다. 아버지와의 불화 때문이었다. 스물여덟의 그가 단지 그런 이유로 집을 나왔다는 것이 -그것도 아버지의 통장 하나를 들고- 조금 어른스럽지 못해 보였지만 과연 그 다운 발상이긴 했다. 우린 서로를 보자 웃음을 터트렸다. 나는 그의 화려한 가출에 웃었고 그는 나와는 어울리지 않은 연구실 유니폼에 웃음을 터뜨렸다. 너무 더운 탓에 우린 근처의 편의점에서 아이스바 두 개를 사들고 그의 차에 앉아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그동안의 정황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가 집을 나오게 된 연유와 앞으로의 내 진로에 대한 고민이 간단하게 오고 가자   남은 것은 이제 그가 어떻게 생활할지에 대한 문제였다. 우린 조용히 차 앞 유리를 보며 그 문제에 대해 잠깐 생각을 했다. 물론 내가 애써 생각해 줘야 할 문제는 아니었지만 당장에 잠 한숨 잘 수 있는 지붕 딸린 집이 없다는 것은 좀 걱정스러운 일이긴 했다. 그렇다고 무작정 며칠이고 비싼 돈을 주며 호텔에 머무를 수 있는 일도 아니다.


  일단 며칠만이라도 호텔에 머무르며 살만한 집을 찾아보는 건 어? 지금은 그 방법 밖에 별도리가 없을 듯한데?”

 “음….” 다 먹고 남은 아이스 바의 막대기를 손에 든 채 그 미간을 찌푸다.

 “그래?”

 “아니면…. 뭐 다른 방도라도?”

 “다른 방도라….”

그는 여전히 미간을 찌푸린 채 나를 향해 마주 보며 돌아 앉았다. 그의 돌연한 자세에 나는 무언가 기발한 생각을 한 것인가 하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가 할 다음 말을 기다렸다.


 “너, 휴가 안 가냐?”

 “어?”

전혀 뜻밖의 질문에 난 내가 잘못 들은 것은 아닐까 하고 귀를 의심했다.

 “휴가 갔다 왔냐고, 아니 연구원은 방학도 없어?”

 “잠깐잠깐. 연구원 방학하고 오빠가 지금 닥친 문제 사이어떤 연관성이 있는 거야?”

 “무슨 소리야! 당연히 연관성이 있지! 너 휴가 갔어?”

 “아니?”

난 여전히 그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채 다 먹은 아이스바를 입에 물고 질겅질겅 씹으며 대답했다.

 “그럼…. 지금 떠나자.”

 “어? 무슨 소리야? 어디로 떠나자는 거고 거기에 나는 왜 끼는 거지? 집은 어떡하고?”

 “아무튼. 난 일도 그만뒀겠다, 안 그래도 여행을 가려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지금 보니까 너 별로 하는 일이 없는 것 같은데? 내일은 금요일이고 별다른 일이 없으면 일요일 날 돌아오는 짧은 여행으로 지금 떠나자고. 집 문제는 그다음에 생각하고. 그러고 싶어. 이제 좋아?”

 “으음….”


 그의 급작스러운 제안에 나는 마음을 정하지 못한 채 앞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물론 여행은 마음에 들었지만 몇 가지가 마음에 걸렸다. 애당초 난 여름휴가를 혼자의 여행으로 계획하고 있다. 게다가 여름방학이 끝나기 이삼일 전에 떠나는 것으로 계획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직 5일은 더 실험실에 나와야 할 의무가 있다. 친구와의 기숙생활은 정리가 되지 않은 터라 집에 여행을 간다는 말은 하지 않을 작정이었지만 실험실은 문제가 달랐다. 미리 얘기하지 않고 자리를 비웠다가는 문제가 커질게 뻔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를 만나러 실험실을 나가며 실험실 동료에게 시간이 없으니 빨리 돌아올 거란 말까지 하고 나다. 상황이 이런데 갑자기 훌쩍하고 여행을 다녀올 테니 그리 알라니…. 그건 너무 무책임한 행동이다. 결국 나는 마음을 정하지 못한 채 미간을 찌푸리며 심각한 얼굴로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나의 반응을 보자 그는 무슨 대답을 할지 이미 알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다음 주에 가자. 아무리 해도 지금은 안 되겠어. 일도 마무리 지 못했고 그리고 애초에 이번 여행은 혼자 갈 작정이었단 말이야.”

 “으음….”

그 역시 다시 미간을 찌푸리며 앞을 응시했다. 갑자기 왜 이야기의 주제가 여행으로 돌아 섰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더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의 제안에 마음이 설레었다는 것이었다.

  “그래. 그럼…. 그렇게 하자. 다음 주 금요일에 다시 올게. 그럼 여행 갈 수 있는 거지?”

 “응.”

그의 대답에 난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싱긋 웃다.

 “어이구… 어쩔 수 없지. 그럼 난 그동안 친구네 집에 머무르면서 살만한 곳을 구해 보도록 할게.”

 “그럼, 그래야지. 아무래도 을 먼저 구하는 게 순서에 맞는 일 일거야. 짐 문제도 있고…. 대신, 시간이 된다면 이번 주 일요일에 만나서 간단하게 여행을 어디로 갈지 정하기나 하자. 서해 쪽을 생각하고 있긴 했지만 오빤 또 어떨지 모르는 일이니까 술 한 잔 하면서 생각해 보자고.”

 “그래. 일요일 저녁 8시 너희 동네로 갈게.”

 “그래.”

그리하여 우리는 그 주 일요일, 1년 만에 만나 서울의 작은 주막에 앉아 술을 마시며 여행지와 코스를 선정하고 음악을 들으며 남은 시간을 여유롭게 보냈다.


  그는 예상보다 수월하게 지낼만한 곳을 구했다고 했다. 비록 성수동의 허름한 단칸방이기는 했지만 혼자 지내기에 무리는 없었고 무엇보다 임대료가 놀라울 만큼 쌌다. 다만 이삿날이 여행에서 돌아오고 난 뒤라 그가 가지고 온 짐들 어쩔 수 없이 여행에서도 달고 와야 했다. 금요일이 되기 전까지 난 실험실 일을 마무리 짓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였고 그는 실업자들이 그렇듯 한 없이 늘어지는 여름을 즐겼다. 그리고 금요일이 되었다. 우리는 모든 일상을 뒤로하고 처음으로 둘이서 여행이랄 만한 길을, 서해바다가 있는 수덕사를 향해 미련 없이 떠났다. 그리고 그여행은 다시금 우리 사이에 이별이 내재된 몇 달간의 시간들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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