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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릿느릿 아줌마와 나무늘보
Feb 25. 2023
1998년의 파란 방 -
3. Autumn leaves
나와 그의 일상에 변한 건 없었다. 변한 것이 있다면 밤이 되면 우린 여전히 어색한 인사를 하고 서로 머뭇거리다가 각자의 방으로 갔고, 새벽녘이 되어서야 내가 그의 방에 혹은 그가 나의 파란 방으로 들어와 어린 남매처럼 서로 꼭 끌어안고 잤다는 것이다. 그것은 아주 따뜻하고 특별한 경험이었다. 그리고 백 퍼센트의 충족감이란 걸 내게 주었다. 우리가 함께 눈을 뜨는 날은 그 뒤로 더 많아졌다. 눈을 뜨면 우리는 서로 코를 비볐고 한동안 눈을 맞췄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누운 채로 천장을 바라보며 이른 아침의 담배를 폈다. 담배 연기는 항상 그의 방 천장 위에서 떠나질 않고 맴돌았다. 포옹, 눈웃음, 담배연기 그리고 천장. 하루하루가 그렇게 흘러갔다.
어느 날 나는 파란 방의 연체동물이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게 누구인지 알 도리가 없었다. 그의 여자 친구는 변함없이 전화를 했고 연체동물은 조용히 파란 방을 표류했다. 나의 일상은 학교를 중심으로 변함없이 흘러갔고 그 안에 그는 언제나 부재였다. 그가 들어있는 시간은 까만 밤과 푸른 새벽 사이 그 어딘가였다.
그는 바라던 대로 마티즈를 샀다.
그의 아파트로 들어온 지 네달째 되던 날, 나는 수업을 마치고 파란 방으로 돌아와 내내 음악을 들었다. 어둠이 내리고, 파란 방 창을 통해 집집마다 차린 저녁 상 냄새가 솔솔 풍겨 들어왔다. 해도 저물어 파란 방도, 거실도, 그의 방도,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다. 나는 그대로 파란 방의 벽에 기대앉아 그가 갖고 있는 마일즈 데이비스의 LP판을 반복해서 들으며 맥주를 홀짝홀짝 마셨다. 그가 아파트 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그가 거실 벽을 더듬거리며 전등불 스위치를 켜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거실에 불이 켜지자 그는 두리번거리며 나를 찾았다. 나는 어둠 속에 몸을 더 깊숙이 묻었다. 하지만 그 작은 집에서 그의 눈을 피하기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가 나를 발견하고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괜찮아?" 그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뭐야....."
"... 뭐... 냐니?"
나의 건조한 말투가 당황스러웠던지 그가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나는 맥주병을 들고 한 모금 더 들이켰다.
"그런 식의 인사는... '너 뭐야?' 라던지 '왜 그러고 있어' 라고 물어야 되는 거 아니야?"
".... 어.... 그런가?"
"응, 대뜸 걱정부터 할 만큼 우리가 그렇게 가까운 사이는 아니잖아? 그런 건... 연인끼리나 하는 거야. "
".... 음...."
".... 음...."
그는 파란 방 문틀을 손으로 집은 채 의아한 듯 나를 쳐다보다가 다시 장난치지 말라는 듯 예의 소년 같은 웃음을 지었다. 스물여덟의 어른이 짓는 소년 같은 웃음이라니, 애초에 어른이 그런 웃음을 지을 수 있다는 따위의 생각은 해본 적도 없었지만 막상 눈앞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불현듯 불안감이 몰려왔다. 나는 가까스로 그에게 혼자 있고 싶다고 말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가 등을 돌려 자기 방으로 들어가는 소리가 들리자 나는 마일즈 데이비스의 ‘Autumn leaves’가 실린 트랙의 번호를 리모컨으로 누르고 반복버튼을 눌렀다. 그가 샤워를 하고 머리를 말리고 세탁물을 돌리는 동안 나는 파란 방의 창가에 기대어 앉아 마일즈 데이비스의 ‘Autumn leaves’를 반복해서 들었다.
이윽고 내가 몽롱한 표정으로 방에서 나와 소파에 몸을 묻자 그는 낮은음으로 마일즈 데이비스의 음악을 흥얼거리며 냉장고에서 셀러리 조각과 남은 빵과 맥주를 한 병 꺼내 바닥에 내려놓고 내 옆에 앉았다.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발로 내 발을 툭툭 건드리며 장난을 쳤고 나는 손으로 그의 얼굴 선을 기분 좋게 쓸어내렸다. 내 손에 닿는 감촉이 좋은 듯 그가 나른하게 눈을 감았다.
초가을의 시원한 바람이 파란 방을 맴돌았다. 머리를 흩트리는 바람결에 고개를 들어 보니 파란 방의 연체동물이 여전히 방향을 잃은 채 허공을 맴돌고 있었다. 문득 이제 그만 이곳을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
파란 방에 이사 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떠날 때도 모든 일은 간단하고 신속하게 진행이 되었다. 이사를 가기 전날, 나는 향나무로 만들어진 작은 화장대 위에 놓인 화장품을 정리하고 이불 두 채를 커다란 보자기로 싸고, 세 칸짜리 칼라 박스에 줄지어 쌓인 책들을 쇼핑백에 정리하고 옷을 여행 가방에 차곡차곡 넣었다. 그다지 복잡한 일도 아니었고 그 때문이었는지 어딘가를 떠난다는 기분마저 들지 않았다. 하지만 다음날 그가 짐 옮기는 일을 도와주기 위해 일부러 일을 일찍 마치고 아파트로 돌아왔을 때는 파란 방을 떠난다는 사실이 실감되었다. 그를 떠난다는 것보다는 파란 방을 떠난다는 사실이 더 크게 다가왔다. 연극으로 치자면 1막이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서둘러 막을 내리는 기분이었다.
파란 방의 창 너머 콘크리트 탑들 사이로 지기 시작하는 노을에 잠깐 시선을 두고 나는 짐을 옮기기 시작했다. 아파트 주차장으로 짐을 운반하는 도중 등 뒤로 줄곧 뼈 없는 연체동물이 따라왔다. 내가 짐을 옮기러 방으로 올라가면 연체동물도 둥둥 떠서 나를 따라왔고, 다시 짐을 들고 파란 방을 나설 때면 연체동물도 아쉬운 표정을 하고 다시 계단을 내려왔다. 하지만 차가 서서히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갈 무렵이 되자 연체동물은 더 이상의 망설임 없이 내 어깨 뒤에 매달린 채 잠이 들었다. 늦은 오후의 어둠이 서서히 거대한 콘크리트 도시를 뒤덮었고 하늘 끝 자락에 남아 있는 흐릿한 노을은 누군가의 가슴을 멍들이며 지고 있었다. 우리는 서로 침묵을 지킨 채 점점 몰려드는 구름을 보며 묵묵히 고속화국도 위를 달렸다. 그는 애써 내가 떠나는 이유를 묻지 않았고 나 또한 설명하려 들지 않았다. 표면상으로 내가 떠나는 이유는 간단했다. 나는 이제 곧 학교 연구실에 들어가 남은 2학기 논문을 준비하며 보내야 했다. 대부분의 시간을 학교에서 보내야 했기 때문에 그의 아파트에서 생활한다는 것은 비경제적인 일이었다. 일주일에 한두 번 집에 들어올 수 있는 정도라면 그의 아파트보다는 원래의 집에서 생활하는 것이 더 이치에 맞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역시 아파트를 처분하고 (원래 부모님 명의였기 때문에 그가 어쩔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부모님과 함께 살기로 되어 있었다.
그의 작은 마티즈가 서울에 들어서기 시작할 즈음 흐릿했던 하늘에 비가 한두 방울 내리기 시작했다. 집 앞에 도착했을 때는 콘크리트 바닥이 전부라고 해도 될 정도로 촉촉하게 젖었다. 얼마 되지 않은 짐을 차 트렁크에서 내리면서 우리는 간단하게 작별인사를 했다. 문득 어쩌면 정말 오랫동안 보지 못하겠구나 하는 생각에 가슴에 알 수 없는 통증이 느껴졌고 그 바람에 어색하게 일그러진 미소를 지은 채 그의 손을 잠깐 동안 잡았다. 짧은 작별을 마치고 나는 망설임 없이 등을 돌려 짐을 들고 아파트 입구 안으로 들어갔다. 어느새 잠에서 깨어난 뼈 없는 연체동물은, 매미가 죽어가는 목소리로 악을 쓰며 마지막 힘을 발휘하는 늦은 가을의 빗속에서 그가 떠난 허공을 향해 또다시 표류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여 우리의 짧은 공동 생활은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