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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의 파란 방 -

2. 산책 재즈 그리고 전화




  그가 회사에서 가장 친한 형을 초대한 것은 두어 달 후의 일이었다. 그의 동료는 나도 만나본 적이 있어서 그다지 불편하진 않았지만 썩 마음에 드는 사람은 아니었다. 어느 쪽인가 하면, 멋있고 성격이 쿨 한 사람이기는 하지만 어떤 부분에 있어선 나와 본질적으로 맞지 않아서 아주 미세한 불균형이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함께 있으면 즐거운 사람이었다. 


 누군가를 파란 방의 아파트로 초대하기 전까지 우린 지극히 무난한 생활을 했다. 아주 가끔, 주말에 약속이 없는 날이면 우리는 편한 복장으로 아파트 근처 대형 마트로 장을 보러 갔다. 햇살이 뜨거운 여름 한낮에 시원한 그늘을 드리워주는 대로변의 가로수 길을 따라 어슬렁어슬렁 걸어갔다. 기운차게 울어대는 매미 소리와 대로변의 멍멍한 차 소리에 우리는 몇 마디 짤막한 대화를 나눌 뿐이었지만 기분만큼은 한없이 느긋하고 평화로웠다. 그는 대형 마트를 처음 가본다는 나를 별세계의 인간인 양 쳐다보았다. 우린 쇼핑이랄 것도 없이 주로 식재료와 생필품을 샀고 그건 꽤나 기분 좋은 경험이었다. 쓸데없이 이곳저곳 돌아다니지 않고 필요한 것만 카트에 담아 계산을 한 다음 나머지는 마음 내키는 대로 구경하는 그의 쇼핑 생리가 나와 맞아서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장보기를 끝내고 아파트에 돌아오면 느긋하게 사 온 물건들을 정리하고 –오전에 산 물건을 오후에 정리한 적도 있었다- 간단하게 식사를 차리고 먹었다. 식후에 난 주로 커피나 녹차를 마셨고 그는 맥주를 마셨다. 작은 냉장고와 찬장에는 맥주와 차가 끊이는 날이 없었다. 차까지 다 마시고 나면 우리는 다시 슬리퍼를 질질 끌고 나와 근처 공원에 가서 엉뚱한 놀이를 하곤 했다. 주로 내가 먼저 시작했지만 그도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하고선 곧잘 따라 했다. 가령 공원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냇가에 발을 담근다던가 - 한 여름에 모기가 기승을 부리는 공원 냇가에 발을 담근다는 건 미친 짓이나 다름없다 - 공원의 정원과 산책로를 구분 짓는 울타리 위를 아슬아슬하게 타는 따위의 놀이였다. 그런 어린아이들의 장난 같은 산책에서 돌아오고 나면 우린 다시 차가운 맥주를 마셨고, 가끔 비디오를 보거나 그가 모은 방대한 양의 재즈 시디를 들었다. 그의 어린 시절 사진이나, 마티즈 앞에서 손으로 브이를 그리며 쭈그리고 앉아 웃는 사진을 보여 준 것은 그때였다. 여자 친구가 찍어 준 것이라며 갖고 있는 사진 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 사진이라고 했다. 어수룩했지만 소년 같은 풋풋한 웃음이 담겨 있는 사진이었다. 이렇게 웃을 줄 아는 사람이라면, 하고 그의 여자 친구를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갈 때쯤 나는 그에게 어색하게 밤 인사를 하고 나의 파란 방으로 돌아와 창문으로 새어 들어오는 달빛을 보며 다시 뼈 없는 연체동물이 되어 표류했다. 가끔 늦은 밤, 알 수 없는 불안함에 잠이 오지 않아 거실 소파에 앉아 묵묵히 어둠을 응시하고 있을 때면 그가 조용히 다가와 내 옆에 앉았다. 하지만 다시 마음이 진정이 되면 나는 어김없이 잘 자라는 인사를 하고 파란 방으로 돌아갔다. 그러고 보니 그와 나는 생각보다 꽤 많은 이야기를 함께 하며 시간을 보냈었다. 


 그날 밤도 꽤 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사온 맥주가 동이 났다. 회사 동료인 형과 그와 나는 줄곧 난해한 곡들이 수록된 재즈 CD를 턴테이블에 번갈아 끼우면서 더 이상 갈아 끼울 만한 CD가 없을 때까지 음악을 들었다. 일상적인 대화들과 상사에 대한 험담, 그저 그런, 내일이 되면 모조리 잊어버릴 무의미한 말들을 하며 웃고 떠들었다. 더 이상 뱃속에 맥주가 들어갈 여유가 없을 때면 화장실에 가서 체중을 줄이고는 다시 들어와 마셨다. 형은 얼큰하게 취했지만 나와 그는 얼굴만 민망할 정도로 화끈거릴 뿐 턴테이블 위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귀를 기울였다. 시곗바늘이 새벽 4시를 막 넘기려고 하자 그도 피곤했던지 맥주병들을 하나 둘 치우기 시작했고 나도 그의 방에 널린 땅콩 껍질과 쓰레기를 치우는 일을 거들어 주었다. 그는 턴테이블 위의 CD를 정리하고 요를 깔고 방바닥에 널브러져 자고 있는 형의 머리 밑에 베개를 받쳐 주었다. 그 사이 나는 어기적어기적 거실 소파로 가서 무거운 몸을 파묻었다. 


 “피곤하지?” 그가 금방 끓인 녹차를 건네주며 말했다. 

“뭘, 오빠야 말로 내일 출근하는 게 힘들겠네요, 나야 내일 수업이 오후에 있어서 상관없지만.”

뜨거운 녹차를 홀짝 거리며 마시자 그도 옆에 앉아서 뜨거운 녹차를 천천히 마셨다. 우리는 서로 아무 말 없이 파란 방 창문으로 불어오는 시원한 새벽바람을 맞으며 앉아 있었다. 

 “아아~ 정말 피곤하다.” 그는 녹차 잔을 바닥에 내려놓고 한껏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그러게요.” 나도 웃으며 녹차 잔을 바닥에 내려놓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우리는 거실에 얕게 퍼지는 담배 연기를 응시했고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난 다시 파란 방을 표류하는 연체동물로 되돌아가려는 찰나였다. 바로 그때 그의 휴대폰 벨이 경쾌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그는 한숨을 쉬더니 힘겨운 듯 전화를 받았다. 그의 여자 친구에게서 온 전화. 이런저런 일상에 대한 보고, 그리고 서로의 애정을 재확인하는 시간. 전화가 길어질 게 뻔했기 때문에 자리를 피하려고 소파에서 일어섰다. 한 발짝만 가면 연체동물로 표류할 수 있는 나의 파란 방이 있다. 그에게 잘 자라는 무언의 손짓을 하자 그가 잠깐 기다리라는 듯 손을 들어 나를 세웠다. 그러더니 폴더 너머로 들려오는 여자 친구의 목소리를 뒤로 하고 나의 정수리에 짧은 굿나잇 키스를 해주었다. 그는 곧바로 전화기를 다시 들고는 방의 미닫이 문을 조심조심 열고 들어갔다. 갑작스러운 그 일련의 행동에 나는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차를 한잔 더 끓여 마시고 소파에 다시 몸을 묻고 앉아 몇 분 간 가만히 있었다. 그러자 몸속 어딘가에 한 번에 응축됐던 감정들이 서서히 흩어지면서 파란 방 창문으로 새어 들어오는 바람을 타고 사라졌다. 불이 꺼져 있는 그의 방을 한 번 쳐다보고는 나는 나의 파란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수많은 하루 중 또 하나의 하루가 그렇게 지나가려 하고 있었다. 


*


 하늘이 투명한 남색 빛을 벗지 못한 새벽 5시, 난 결국 잠자기를 포기하고 파란 방 창가에 기대 서서 아파트 콘크리트 벽들 사이로 살짝 모습을 드러낸 새벽을 응시하고 있었다. 등뒤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려 보니 그가 잠옷차림으로 베개를 들고 내방 문턱에 서 있었다. 얼굴엔 잠이 아직 떨어지지 않은 표정이었다. 그는 멋쩍은 듯 내 이름을 한번 부르더니 바닥에 깔린 요에 누워 나를 올려다보았다. 푸르스름한 새벽빛이 파란 방에 출렁하며 차가운 그늘을 드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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