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느릿느릿 아줌마와 나무늘보
Dec 31. 2022
수덕사에서 조금 떨어진 여관방에서 눈을 뜬 건 정확히 아침 6시 40분경이었다. 새벽에 일어나 일출을 보러 가자는 전날의 계획과는 달리 해는 이미 밝아 있었다. 옆에선 그가 아직 깊은 잠에 빠져 있다. 또다시 낯선 천장. 파란방에서 처음 눈을 떴을 때의 기억이, 공기와 냄새, 밀도가 다른 공간의 균열이 머릿속 깊숙한 곳에서부터 차갑게 차올랐다.
‘아아, 내가 여태껏 살아왔던 곳의 풍경이 아니구나.’ 이상의 낯선 감정. 그 파란방에서의 기억들이 조각조각 모여 지금의 천장을 전혀 다른 세계로 만들고 있었다. 멍한 시선으로 천장을 바라보다가 전날 마신 술의 영향으로 화장실을 가야겠다는 욕구를 느꼈다. 술이 덜 깨긴 했지만 머리는 아프지 않았다. 대신 속이 약간 거북하고 입에서 아직 술 냄새가 났다. 화장실에 들어가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보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익숙한 듯 낯선 몸. 화장실 욕조에 기대앉아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보면서 잠깐동안 여관 화장실에서만 맡을 수 있는 특유의 냄새를 맡았다.
아침의 여관방 화장실 냄새는, 술기운이 남아있든 맨 정신이든, 언제나 그 전날 밤에 느꼈던 혼란보다 더한 혼란과 농도가 짙은 허무를 안겨준다. 뇌 속 깊숙이 각인되는 그 냄새는 익숙하지만 깊이를 잴 수 없는 허무와 혼란 속으로 나를 몰아넣었다. 공기에 미세하게 떠다니는 그 불안정한 기운을 폐 속 깊이 들이마시자 참을 수 없이 구토가 일어났다. 나는 얼굴을 변기에 처박은 채 전날 밤 위속으로 밀어 넣었던 음식과 술을 모조리 게워 냈다. 위가 조금 조이는 듯한 느낌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불쾌감도 느껴지지 않는다. 양치를 하고 다시 방으로 돌아와 그의 품속으로 파고든다. 그의 차가운 살에 몸이 닿자 차갑지만 기묘한 전율이 일었다. 침대 옆으로 손을 뻗어 한동안 피지 않았던 담배를 더듬더듬 찾아내 불을 붙인다. 담배 연기가 천장의 색을 뿌옇게 흐리며 기분 좋게 퍼져 나갔고 나는 다시 얕은 잠에 빠졌다. 그 얕은 잠의 표면 위로 수덕사에 도착한 이후 그와 함께 했던 시간들이 떠올랐다. 숙소 근처를 산책하며 잡았던 따뜻한 손, 장난스러운 웃음, 보풀이 일어난 후줄근한 스웨터 그리고 지난 2년 간 방치됐던 시간들, 손가락 사이로 속수무책 빠져나가는 너무나도 많은 못했던 이야기들과 전해질 수 없는 이야기들이 담배 연기와 함께 사라지고 있었다.
*
30분 뒤 다시 얕은 잠에서 깨어났다. 낯선 천장은 여전히 내 머리 위에서 입을 벌리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 그를 봤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천장과 눈싸움을 하고 있었다. 잠과 현실의 경계선에서 사투를 벌이는 그 모습이 너무 어린아이 같아 나도 모르게 그의 입술에 가벼운 입맞춤을 했다. 어색하게 미소를 띠고 다시 손으로 더듬더듬 담배를 찾아 입에 물고 불을 붙인다.
“아침에 눈 뜨자마자 피우는 담배, 정말 오랜만이야.”
누운 채 다리를 꼬며 박하 향의 담배 연기를 깊숙이 들이마시며 그에게 말했다. 오늘 처음으로 들리는 나의 목소리는 낮게 깔려 있었다.
“그래?”
그가 내게 차가운 몸을 기대며 바닥에 떨어져 있는 담배 갑을 주으며 대답했다. 나는 흡족한 표정으로 손에서 타 들어가는 담뱃불을 쳐다보았다.
“건강에 안 좋다지만 어쩔 수 없을 때가 있더라고."
"가령?" 그가 물었다.
"가령... 열심히 작성한 프로젝트 파일을 회의시간 직전에 날려버렸다거나, 믿었던 동료한테 뒤통수를 맞았을 때 같은?"
"어휴 바보야. 너 여전히 허당이구나?"
"허당이래도 어쩔 수 없어. 어쨌든 오빠의 영향도 크니까.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피는 담배가 가장 맛있다고 오빠가 나한테 가르쳐 줬잖아. 아주 오랜 옛날에 말야, 파란 방에서 뼈 없는 연체동물이 몽롱하게 표류하고 있었던 시절에."
"뭐? 파란방? 연체동물?"
"있어.. 그런 거. 몰라도 돼."
천장은 여전히 낯설었지만 오래전, 파란 방에서 연체동물이 정말로 표류하고 있었던 시절에 이런 낯선 정경을 그와 함께 한 적이 있었다. 과거에나 지금에나 그와 함께 할 수 있는 유일한 기억이라는 생각이 들자 더 이상 낯설지 않은 공간과 시간이 되었다. 그저 그런 생각을 하며 필터에 입술을 대고 달콤한 기분으로 남은 담배를 피우려고 하자 그가 손에 들고 있던 담배를 빼앗아 재떨이에 비벼 껐다. 언짢은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자 그렇게 쳐다보지 말라는 듯 그가 차가운 몸을 내게 포갰다. 다시금 의식이 몽롱해지는 순간 내 안에 깊숙이 웅크리고 있었던 허무의 덩어리들이 산산조각나면서 온몸이 나른해졌다.
"사랑해"
내 안의 또 다른 누군가가, 옛날 그 파란 방의 연체동물이, 내 입을 통해 오랫동안 웅크리며 숨어있던 모습을 드러냈다. 두려움이나 일체의 망설임 따위의 감정은 없었다. 다만, 지금껏 지나온 시간처럼 모르는 채 자신의 감정을 방치하고 싶지는 않았다. 서로의 현실이 엄청난 공백을 사이에 둔다고 해도 지금은 이대로 좋다고 생각했다. 인식도 하지 못한 채 다시 나의 감정을 끝 모를 시간 속에 묻어 두고 싶지가 않았다. 단지 그뿐. 그가 그다지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길 바라며 –그의 성격상 그러지 않으리라고 확신하는 편이지만- 그걸로 됐다고 생각했다. 감정을 지속시키기에는 심각성이 배제된 편이 훨씬 수월하다.
우리는 어기적 어기적 일어나 얼음장 같은 차가운 물로 지난밤과 지난 시간의 흔적을 흘려보내고 덜덜 떨리는 몸으로 서로 포옹하며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100%의 충족감 중 어느 한 조각이 욕조의 배수구를 통해 빨려 들어가고 있었지만 그냥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다. 담배 한 개비를 다시 피워 물고 어서 진한 커피 한잔을 마셔야겠다고 생각했다. 그의 따뜻한 손을 잡고 숙소를 빠져나와 이른 아침의 수덕사를 한 바퀴 돌고 기념사진을 남기고 커피를 마셨다. 검고 진한 카페인 덩어리가 방금 떨어져 나간 허무의 자리에 쓰린 위안을 남겨 주었다. 얼마간은, 어쩌면 생각 보다 오랫동안 버틸 수 있을 거란 생각. 그렇다면 그걸로 됐다. 아직 그의 따뜻한 손을 잡고 있으니 더 욕심 내지 말자. 아침 안개로 뒤덮인 절의 오솔길, 나는 그를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