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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쫒는 연체동물-

2. 음악이 주는 기억

 


  그의 음악적 취향에 대해 얘기하자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확실한 것은 지극히 극단적이라는 것이다. 덕분에 나 역시 어느 정도 그에게 영향을 받았지만 나는 여전히 그와는 다른 색을 지니고 있다. 분명 공통되는 부분이 많긴 하지만 내쪽이 훨씬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즐긴다고 하는 게 옳을지도 모르겠다. 그의 음악은 정통 재즈에서 시작해 클래식에서 이야기를 만들어 내고 비틀스나 너바나 같은 팝에서 끝나는 반면 나는 클래식은 물론이고 재즈나 팝, 영화음악, 심지어 중동 음악과 가볍지만 평화로운 느낌을 주는 모던 클래식에 이르기까지 일회성 가요를 제외하고 거의 모든 장르의 음악을 좋아한다. 요즘에는 멕시코와 아프리카, 부탄의 전통음악에 심취해 있다. 그는 요즘 하드락에 빠져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여행을 하면서, 그것도 뻥 뚫린 서해안 고속도로를 시원하게 달리면서, 미친 듯 발악하며 무슨 가사 인지도 모를 노래를 부르는 ‘KOЯN’의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조금 당황스러운 일이다. 서해 대교는 멋진 안개로 뒤덮여 있었지만 그의 얌전한 은색 코란도 안에서는 ‘KOЯN’의 찢어질 듯한 목소리가 계속해서 울려 퍼지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년이라는 시간은 그의 음악적 취향을 조금 난해하게 만들 만큼은 충분한 시간이었던 것 같다. 콘의 음악에 맞추어 손가락으로 핸들을 가볍게 두드리는 그의 옆모습을 보면서 ‘꽤나 귀엽다’고 생각했다. 음악적 취향이 어떻게 바뀌었던지 간에 그는 여전히 오 년 전의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 점심을 먹지 않았기에 슬슬 배가 고파지기 시작했다. 난 KOЯN의 찢어질 듯한 음악 볼륨을 잠깐 낮췄다.

 “배 고프지 않아?” 

“그다지…. 너, 배고프구나?”

“그보다 카푸치노가 한잔 마시고 싶어. 몸도 춥고 안개까지 꼈으니, 좋을 것 같아 카푸치노 한잔. 그리고 물약으로 된 소화제도 하나.”

요즘 유행하는 모델의 조립식 선글라스를 -그의 말에 따르자면 산악자전거용 선글라스라고 하는 것이다- 쓴 그가 파스텔 톤의 노란 안경알을 위로 젖히며 놀란 듯 말했다. 

 “커피에 소화제라고? 너 점심도 안 먹었잖아. 배 고픈 거 아니었어?”

“어, 배고파. 하지만 요즘 속이 좋질 않아서 뭘 먹든 조금만 들어가도 금방 불편해져. 그냥 난 점심으로 카푸치노 한잔이면 될 것 같아. 소화제는 나중에 혹시 모르니까 상비용으로 사자는 거구.”

“아아…. 속이 그렇게 안 좋다니.”

그는 신기하다는 듯이 내 말을 반복했다. 

 “그럼 우리 서해대교 넘어 처음 마주치는 휴게소에 들르자.”

그는 걱정스러운 듯 나를 한번 보더니 차의 속력을 높였다. 

 “내가 살께 카푸치노는.” 

운전대를 잡은 채로 앞을 보며 그가 말했다. 다정한 목소리다. 


 그의 말대로 우리는 서해대교를 넘자마자 보이는 휴게소에 들러 카푸치노 한잔과 소화제 그리고 호두과자를 사서 잠깐 서해 대교 너머로 보이는 바다를 감상하며 호두과자를 먹었다. 삼 년 전, 서해 바다를 처음 봤을 때와 같은 함성도 서로를 부둥켜안고 마냥 좋아했던 감흥도 없이 우리는 묵묵히 바다만 바라봤다. 그리고는 점점 심해지는 안개에 몸이 흠뻑 젖기 전에 다시 차에 올라탔다. 여행을 하면서 식사를 잘 챙기지 않는 건 둘 다 여전했다. 차에 올라타자 그는 고맙게도 내 부탁대로 다소 조용한, 내가 가지고 온 이름 없는 밴드의 이름 없는 음악으로 음악을 바꿔주었다. 그 이름 없는 그룹은 연신 그때는 자기가 너무 어렸다는 것을, 서로가 몰랐다는 것을 이젠 알겠냐며 돌아와 달라고 그렇게 누군가에게 애절하게 호소하고 있었다. 읊조리듯 건조한 음이었지만 반대로 내용이 무척이나 감상적이었다. '오빠가 미친 듯이 보고팠던 9월에 들었던 노래야.'라고 말하며  ‘Bulldogmansion’이라고 적힌 주황색의 앨범 재킷을 건네주자 그는 '이런 그룹도 있었구나, 괜찮은데?' 하며 케이스를 들여다보았다. '하지만 이 그룹 스타일 어째 아저씨 같이 생겼는걸?'라고 말하는 바람에 결국 웃음을 터트리긴 했지만 사실이었다. 재킷에 실린 그 이름 없는 밴드의 사진은 20대의 그늘이 아쉽게 묻어 있는 듯한 30대 후반의 아저씨 풍이었다. 더 잘 찍을 수도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은 그다지 도움이 되질 않았다. 어쨌든 시간은 지금까지 흘렀고 그들은 여기 남아 나를 위해 노래를 불러 주고 있으니 그것으로 된 거다. 차창 밖으로 지나가는 풍경을 보며 이년 전 그와 헤어질 무렵엔 절대 애틋하지 않았던 기억들이 떠올랐다. 기억들은 묵직한 실체를 느낄 수 있는 차창 밖의 차가운 공기처럼 나에게 미묘한 여지를 남기고 있었다. 어째서 인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미묘하고 애틋한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차창 밖으로, 짙은 안개와 따뜻한 카푸치노 한잔의 향기 사이로 지난 시간의 단편들이 내 앞에 바짝 다가와 조용한 소리로 뭔가를 속삭이고 있는데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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