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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쫓는 연체동물 -  

1. 여행




 11월의 날씨치곤 햇살이 제법 강한 날이다. 토요일의 짧은 업무가 어서 끝나기를 기다리며 사무실 책상 앞에 앉아 무의미하게 컴퓨터 화면을 바라본다. 창문에 비치는 파란 하늘은 앞으로 두 시간 여 남은 업무를 짜증스럽게 만들기엔 충분했다. 어차피 무슨 일을 하든 손에 잡히지 않는다. 다음 월요일로 미루는 건 정해진 일이다. 컴퓨터 화면을 끄려는데 불법 사이트들이 한꺼번에 속수무책으로 뜬다. 무언가를 또 잘못 클릭 한 모양이다. 컴퓨터를 로그 아웃하는 것도 귀찮아 전원을 아예 꺼버린다. 마음은 이미 그에게로 향해 있다. 동료들에게 나의 이런 조급한 마음을 들키기 싫어 서둘러 화장실로 발걸음을 옮기다 마음을 바꿔 2층의 넓은 휴게실로 향한다. 다행히 그곳엔 아무도 없다. 출근할 때부터 내내 주머니 속에서 만지작 거리고 있던 휴대폰을 꺼내 한숨을 크게 쉬고 용기를 내어 그에게 전화한다. 신호음이 두세 번 울리더니 ‘툭’ 소리를 내며 그가 전화를 받는다.


  “일도 손에 안 잡히고 대충 마무리 지었으니까 좀 일찍 출발할까?” 조급한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본론으로 들어간다.

 “너구나? 뭐가 그렇게 급해? 아무튼 나도 지금 막 출발하려던 참이니까 40분 뒤면 도착할 거야.” 그는 나와는 다르게 차분한 목소리다.

 “알았어.” 나는 그의 대답에 만족스러운 웃음을 짓고 제멋대로 날뛰는 마음을 진정시킨다.

 ‘앞으로 40분이니까.'

당연한 얘기지만 한 시간 뒤에 있을 회사의 점심시간은 건너뛰기로 한다. 애초에 토요일 근무에 점심시간까지 포함시킨다는 건 이해되지 않는다.

 ‘앞으로 40분이니까….’  세계를 구제할 주문이라도 외듯 손목시계를 보며 되뇐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손에 자판기 커피가 들려 있다. 커피 잔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두 달 전 그와의 재회를 떠올린다. 뜻하지 않았던 재회. 아니, 엄밀히 말해 마음속으로 열망했던 만남이긴 했지만 정말 만날 수 있을까? 하는 희미한 의구심이 들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이 년 동안 잊고 지냈던 그가 가을 초입에 불현듯 생각난 것도 이상한 일이었다. 서로 남인 것처럼 관심을 끊은 채 지내 왔다가 그가 못 견디게 보고 싶었던 건 나로서도 납득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의 연락처는 모두 잃어버린 상태였다. 내게 남아 있는 건 그의 아이디뿐 정확한 메일 주소조차 몰랐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의 소식을 묻는 메일을 이곳저곳에 보내 봤지만 한 달간 아무 소식도 없었다.


 ‘이것으로 끝인가. 결국 기억 속에남아있사람이 되는 건가.’ 하는 순간 그에게 쪽지 한 통이 날아왔다.  “내가 알고 있는 사람이 맞다면 아래 번호로 연락을 주라”는 쪽지였다. 그답게 짧고 간결한 메시지다. 그 짧은 메시지가 이미 그라는 보증을 해 주었다. 의심할 여지가 없는 확신. 하지만 그와의 만남이 누구나 생각하는 그런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극적인 성격을 띠는 것은 아니었다. 그와 추억들이 어느 특정 시기에 집중적으로 있긴 했었지만 앞으로의 만남에 애틋함이나 가슴 설렘을 줄 만한 것들은 아니었다. 다만 조금 특별한 경험이었을 뿐, 그 당시엔 느끼지 못했던 그에 대한 기하학적인 그리움을 지금에 와서야 던져 주는 그런 미묘한 성질의 것이었다. 왜 하필이면 지금에 와서일까? 하고 생각해 봤지만 답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어쩌면 해마다 이맘때면 고개를 드는 내 본질적인 공허함의 결과였는지도 모른다. 이도 저도 아니면 단순히 가을의 기운으로 몸 안의 호르몬이 잠깐 반향을 일으키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와 함께 했던 짧았던 간들이, 특별하지만 결코 낭만적이지 않았던 메마른 기억들이, 뒤늦게 와서 내퍼센트의 충족감을 줬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10월 중순, 두어 번의 짧은 만남 뒤에 우린 11월의 여행을 계획했다. 시간은 얼마든지 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 허락된 시간은 고작 이틀뿐이었다. 그는 산악자전거 동호회에서 개최하는 트레이닝 코스에 참여한다고 집에 둘러댔다. 이년이라는 시간은 이미 많은 것에 균열을 일으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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