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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릿느릿 아줌마와 나무늘보
Nov 03. 2022
새벽,
물안개가 걷히지 않은 강변의 아침을 바흐의 무반주 첼로를 들으며 자전거로 달린다. 일주일에 적어도 2번, 나는 아직 동이 트지 않은 시간에 자전거를 끌고 나와 도시의 강변을 따라 가볍게 페달을 밟는다. 그러면 해는 서서히 내가 돌린 페달의 바퀴 수만큼 희미한 안개에 가려진 강 너머 도시 위로 모습을 드러낸다. 자전거를 세우고 강 너머로 떠오르는 해를 지켜보면 바흐의 바이올린 첼로는 중반부를 넘어 묵직한 선율이 아름다운 후반부로 넘어간다. 동이 트는 것을 지켜보며 가을의 찬 기운으로 하얀 입김을 내뿜는다. 강변의 뿌연 안개가 물러날 즈음 나는 자전거를 돌려 내가 사는 아파트로 돌아간다.
내가 사는 5층짜리 공동 아파트는 강변에서 약 20분 거리에 있는 오래된 건물이다. 그다지 깨끗한 건물이 아니라는 것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지만 나름의 고풍스러운 멋이 있어 임대료가 싼 편은 아니다. 하지만 혼자 지내기에는 군더더기 없고 방의 동선도 마음에 든다. 높이에 비해 옆으로 뻗은 길이가 길어 아파트에는 꽤나 많은 독신자들과 부득이하게 자취를 할 수밖에 없는 학생들, 다양한 이유로 이곳까지 흘러들어온 사람들이 살고 있다. 붉은색 벽돌로 지어진 아파트 벽에는 여름에 넝쿨 식물이 자라 멀리서 보면 르네상스 시대의 건물처럼 꽤나 고풍스러운 전원 풍경을 자아낸다. 하지만 실상은 근방 강가에 서식하고 있는 모기와 곤충들이 꼬이기에 딱 좋은 환경이다. 보기에는 좋지만 여름엔 나름대로의 희생을 감수해야 하고 겨울에는 바짝 마른 넝쿨 식물이 삭막하기 이를 대 없다. 하지만 난 이 아파트가 좋다. 좋아한다기보다는 지내오면서 나름대로 알 수 없는 애착이 생겼다. 알고 지내는 사람이라고는 한 명도 없지만 겨울의 삭막한 풍경이며 아파트에서 몇 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단풍나무와 스트로브 잣나무, 라일락, 잣나무 밑에 황폐하게 먼지가 쌓인 벤치가 썩 마음에 든다. 도시로 이어지는 도로가 아파트에서 불과 5분 거리에 있다는 사실은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 길이 강변을 끼고 있다는 점은 마음에 든다. 아파트는 강변의 이쪽 편에 있고 도시는 강변의 저쪽 편에 있다. 이쪽 편 역시 도시의 일부지만 차도 많이 다니지 않고 비교적 조용하다.
아파트 입구에 설치된 자전거 행어에 내 MTB 자전거를 고정했을 때 해는 정확히 시선 높이로 떠올라 있었다. 이제 곧 사람들이 하나 둘 회사에 가기 위해 집을 나설 시간. 카드 키를 긁고 방 번호를 신중하게 누른 다음 아파트 입구의 투명한 유리문을 열고 휑한 복도 끝에 있는 내방으로 가는 동안 밤새도록 복도를 울린 전화벨이 생각난다. 하나 건너 마주한 방에 살고 있는 그녀는 끝끝내 전화를 받지 않았다. 외박을 한 것인지 어떤지 모르겠지만 전화는 공허하게 혼자 울리다 새벽 4시가 돼서야 멎었다.
내가 사는 아파트 동에는 각 호실에 전화선이 따로 없다. 전화는 1층 로비에 하나밖에 없는데 누구든 전화를 쓰려면 1층 로비로 내려와야 한다. 행여라도 한밤 중에 전화가 걸려오면 1층에 사는 사람들은 꽤나 성가셔진다. 잠이 깨지 않아 폭격을 맞은 듯한 몸과 마음으로 계단을 올라 4층 또는 5층에 사는 사람들에게 전화를 바꿔줘야 하기 때문이다. 1층의 그녀에게 있어 그런 수고를 한결 같이 감수해준 사람은 2층에 사는 학생이었다. 학생이라 하기에는 나이가 조금 들어 보이지만 며칠 전 우체부가 내 우체통에 잘못 넣어둔 우편물을 보고 그가 학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발신인 주소에 포항대 인장이 찍혀 있었다. 2층 208호라면 1년 전 이사 온 그 학생이 틀림없었다. 교수라고 하기에는 너무 젊고, 대학 관계자라고 하기에도 학생의 이미지가 너무 강했다. 어찌 되었든 1층에 사는 사람도 귀찮아 받지 않는 전화를 2층에 사는 그가 슬리퍼를 끌고 내려와 전화를 대신 받아 주는 것은 납득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래도 그는 그런 수고를 감수했다. 기다리는 전화가 있는 것이 아니면 1년 중 300일을 불면증에 시달리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어젯밤 그는 기다리는 전화도 없고 불면증에도 시달리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전화가 울릴 때면 어김없이 들려왔던 슬리퍼 끄는 소리와 방문을 정확히 세 번 노크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갑자기 몰려든 피곤한 일들에 정신을 잃고 잠들었는지도 모르고, 단순히 이제 더 이상 전화를 받으러 가지 않겠다고 결심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열쇠 구멍에 열쇠를 넣고 돌린다. 문의 잠금장치가 찰칵하고 열리며 경쾌한 소리가 복도를 울린다. 방에는 아침에 집을 나오면서 널브러논 이불이 침대 위에 그대로 놓여 있다. 그때까지 귀에 꽂았던 이어폰을 빼내자 바흐의 첼로 협주곡이 그대로 사라진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아침 햇살이 침대 위 폭신한 이불을 따스하게 비춘다. 열쇠를 침대 옆 협탁 위에 던져 놓고 웃옷을 벗고 창문의 커튼을 활짝 제친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밝은 햇살에 문득 옷을 한 올도 몸에 걸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출근까지는 아직 두 시간 정도 여유가 있고 시디플레이어에는 전날 밤 들었던 정경화의 바이올린 협주곡이 그대로 있다. 시디플레이어의 전원을 켜자 정경화의 바이올린 협주곡이 방안의 차가운 공기를 가르며 예민하게 울린다. 나는 알몸인 채로 폭신한 이불에 미끄러져 들어갔다. 생각보다 이불속이 차가워 온 몸의 세포가 오그라들면서 옆구리에 짜릿한 기운이 감돌았다. 뭔가 따뜻한 것이 차가운 몸을 감싸 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자 어처구니없게도 아침부터 그의 품이 그리워졌다. 온몸으로 나른하게 퍼지는, 현재로서는 실현 불가능한 욕구를 느끼며 시계 알람을 한 시간 뒤로 맞추고 출근 전에 해야 할 일들을 머릿속으로 정리한다. 무엇보다 불현듯 든 욕구를 가라앉히려면 뜨거운 커피라도 마시고 출근을 해야 할 것 같다. 나른한 잠이 내 의식을 점점 깊은 동굴 속으로 밀어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