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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쫒는 연체동물 -

4. 비긋기



  수덕사를 뒤로하고 공주의 마곡사로 향하는 길, 차가 운암령의 좁은 계곡을 통과할 때 즈음 하늘에서 가을비가 한두 방울 떨어지기 시작했다. 전날 밤의 피곤함과 수덕사 산장에서의 푸짐한 식사로 중간중간 그의 어깨에 기대어 깜박 졸았다.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내리는 그의 손길. 눈을 떠보니 차창 밖으로 비가 내렸다. 차 안은 고요했고 창을 두드리는 빗소리만 들려왔다. 비안개.

 문득 류이치 사카모토의 음악이 떠올라 가방 안에서 가져온 테이프를 꺼내기 위해 고개를 들자 “깼어?” 하고 그가 조용히 속삭였다.

 “응. 류이치 사카모토의 음악이 듣고 싶어서.”

 “류이치 사카모토?”

 “응. 영화 마지막 황제 알지? 그 영화음악 제작한 일본 작곡가의 음악.”

 “들을 만해?”

 “어…. 글쎄. 오빠가 좋아할지는 모르겠네. 정통 클래식은 아니니까.” 잠에서 완전히 깬 나는 가방에서 테이프를 꺼내 카세트 데크에 꽂았다.

 “이것도 테이프이네.”

 “응.. 나 시디 플레이어가 없으니까, 옛날에 샀던 워크맨으로 계속 들으려니까 테이프를 사게 돼”

 "많이 듣다 보면 테이프 늘어나지 않아? 웬만하면 시디 플레이어 하나 사라. 아무래도 시디가 더 보관 가치가 있지 않을까?”

 “그건 그렇지만, 지금도 좋아 난. 이 워크맨 고장 나면 그때 사지 뭐.”

 “피…. 너 같은 구두쇠가 퍽도 사겠다.”

 얼굴을 찌푸리며 말하는 그의 말에 난 조용히 류이치 사카모토의 테이프를 앞으로 돌렸다.

 “아무튼. 사고 싶은 카메라도 지금 못 사고 있는데 시디 플레이어는 사치야. 차도 사야 하구….”

 “그래그래. 너 차 사야 하지? 아직도 마티즈가 갖고 싶어?”

 “당연하지. 하지만 뭐, 차 살 때쯤 되면 그것 말고 다른 맘에 드는 게 생길지도 모르니까 장담은 못하겠어.”

테이프가 딱 소리를 내며 멈추자 난 데크의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어, 제목이 뭔데?”

 “아쿠아. 졸다가 일어나 보니까 비도 오고 빗소리도 좋아서, 어울릴 것 같아. 사실 이것도 9월 즈음에 줄기차게 들었던 곡이야.”

 류이치 사카모토의 아쿠아가 창밖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배경으로 시작되었다. 볼륨을 높여도 되겠냐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자 그가 길고 가는 하얀 손가락을 뻗어 나 대신 볼륨을 최대로 높여 주었다. 빗소리만큼이나 청명한 피아노 소리가 물방울이 떨어지며 내는 공명음처럼 차 안에 울려 퍼졌다. 우리는 음악을 들으며 비안개에 둘러싸인 산길을 천천히 달렸다. 얼마간 그렇게 음악만 듣고 가다가 그가 차를 세웠다. 우리는 차창으로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조용히 음악을 감상했다. 음악이 멈추자 그는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으로 잠시 동안 그대로 더 앉아 있었다. 나도 잠자코 있었다. 이윽고 그가 시동을 걸고 다시 출발했다.

 “무슨 생각… 했어?”

 “…. 이 음악도 나를 생각하면서 네가 들었을까 하는 생각. 그래?”

 “…. 응.”

 그는 차 앞유리에 시선을 고정한 채 조용히 나의 손을 잡아주었다.

 카푸치노 한잔이 생각날 만큼 가슴이 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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