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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릿느릿 아줌마와 나무늘보
Mar 19. 2024
그는 돈가스를 정말 좋아한다. 얇게 저민 돼지고기에 밀가루와 계란물을 묻히고 빵가루를 입혀 바삭하게 튀겨낸 다음 데미그라스 소스를 보기 좋게 얹은 돈가스를 그는 입을 크게 벌리고 먹는다. 그 모습이 마치 일본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착한 소년이 프라이팬에 노릇노릇 구운 큼지막한 스테이크 덩어리를 한입에 꿀꺽 삼키는 모습 같다. 단지 나이프로 잘게 썰어 먹는다는 것이 다를 뿐이지 그는 정말 돈가스를 맛있게 먹는다. 먹는 소리도 만화적으로 얌얌 짭짭하고 난다. 얌얌 짭짭. 결정적으로 돈가스를 먹는 그의 모습은, 귀엽다. 이런저런 이유로 결국 나도 돈가스 마니아가 되어 버렸다. 특별히 돈가스를 싫어하는 것도 아니어서, 더욱더 좋아하게 되었다. 그와 다른 점이 있다면 종류를 불문하고 좋아한다는 것뿐. 어느 날은 와사비와 소금만으로 충분하고 입맛이 변덕을 부릴 때는 돈가스 가쯔나베나 돈가스 카레를 즐긴다. 뭔가를 얹은 걸 제외하면 돈가스 자체의 본질은 잃지 않고 있다. 맛있다. 돈가스 가쯔나베와 돈가스 카레. 생각만 해도 벌써 군침이 돈다.
*
그를 만나기로 한 건, 얼마 전 여행에서 찍은 사진을 전해 주기 위해서였다. 우린 여행을 하며 끝내 먹지 못한 돈가스를 먹기 위해 장소를 일식 전문 식당으로 정했지만, 시간이 너무 늦은 바람에 웬만한 식당들이 문을 다 닫은 후였다. 문을 연 일식 식당을 찾아다니느라 분당과 서울 근교를 차로 한 바퀴 헤매었지만, 결국엔 너무 배가 고파 어쩔 수 없이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파는 돈가스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일식 정통 돈가스에 비할 맛은 아니었지만 우리는 그냥 돈가스라는 사실에 만족하기로 했다. 소스가 약간 진하고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얇은 돈가스.
“그날은 잘 들어갔어?” 하며 그날도 역시나 만화적으로 돈가스에 소스를 묻혀 가며 먹고 있던 그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고개를 들고 물었다.
“응. 오빠는?”
“나도.”
“그때, 해도 많이 기울고…. 꽤 어두워진 후에야 들어갔었지? 우리.”
“아냐, 그렇게 늦진 않았어.”
약간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그가 싱긋 웃었다. 그의 싱긋 웃는 모습을 보면 항상 하얀 마티즈 앞에 쪼그리고 앉아 손으로 브이자를 만들며 웃는 모습이 담긴 옛 사진이 생각난다. 5년 전, 그때의 파란 방에서, 여자 친구가 찍어 주었다며 보여 주었던 사진이다. 지금 그 사진은 헤어진 여자친구에게 있을까, 아니면 자기가 그냥 간직하고 있을까, 잠깐 궁금해졌지만 묻지 않기로 했다.
“집에서는 뭐라고 하지 않았어?”
너무 진한 돈가스 소스에 더 이상은 포크를 들지 못하고 물을 한 모금 들이마시며 그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응, 별다른 건 없었어.”
“그래? 너무 늦었다고, 왜 전화는 자주 안 했었냐고 화내지 않았어?”
평소의 나답지 않게 너무 많은 질문을 한다 싶었지만 나도 모르게 그런 말이 튀어나와 버렸다. 순간 후회가 되어 대답하지 않았으면 했는데 “아니? 그냥 자던걸?” 하며 그가 말해 버렸다.
“으응. 그랬구나.”
멋쩍게 어깨를 들썩이며 웃어 버렸다.
“넌? 오빠가 뭐라 안 그랬어?”
“여행 간 사실 모르니까.”
“으응.”
그한테는 여행을 간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핑계 삼아 친구와 여행을 간다고 말할 수도 있었지만 그런 거짓말도 꾸며내기 싫어 전화가 올 때마다 시종일관 집이라고 얼버무렸다. 여행을 가던 날, 사귀는 사람은 회사 야유회로 일박 이일 동안 부재중이었다. 문득 그와의 여행에서 여러 차례 울린 핸드폰 벨소리가 생각난다. 전화기에 뜨는 발신자 번호를 보며 여자 친구와 여행 중이라고 이야기해야 할지 그냥 집이라고 얘기해야 할지 망설였던 모습이 씁쓸하게 기억난다.
“아 맞다. 그때 찍은 사진. 사진이 잘 나온 편이던데…. 오빠가 찍은 건, 피사체가 지나치게 작게 나왔지만….”
“어디 봐.”
우린 돈가스 접시를 옆으로 밀어 두고 사진을 보기 시작했다.
“뭐야! 잘 나왔네.”
한 장 한 장 자신이 찍은 사진을 넘기며 그는 다소 과장된 몸짓을 했다.
“치~ 사진 잘 찍는다더니 전부 거짓말이었네.”
“무슨 소리야? 잘 찍은 것 같은데!”
그의 우격다짐에 난 코웃음을 쳤다.
“음…. 아무래도 오빠 독사진만 가져가야겠지?”
둘이 같이 찍은 사진 중 가장 예쁘게 나온 사진 한 장을 들고 그에게 물었다.
“이거, 잘 나왔지….?”
“어? 정말 그러네.”
“응.”
우리는 고개를 맞대고 사진 속에서 웃고 있는 두 사람의 정경을 보았다. 사진 속의 그와 나는 마치 연인 같았다. 잘 어울리는 두 연인이 서로 다정하게 서서 카메라를 향해 웃고 있다. 사진 속 세상은 아무런 문제가 없는 듯 평온해 보인다.
“아무래도 이 사진을 오빠가 가져가는 건 무리일 것 같아. 혹시라도 문제를 일으킬 만한 소지가 충분한 사진이니까…. 날짜도 밑에 적혀 있고.”
“그런가?”
“응. 이건 그냥 내가 간직할게.”
그렇게 얘기했지만 실제로는 그가 사진을 가져가길 바랐다. 하나쯤은 나를 기억할 만한 사진을 가지길 바랐던 것일까…. 설사 그 사진이 언젠가 그의 일상에 큰 파문을 일으킨다고 해도 말이다. 하지만 난 그런 이기적인 생각 따위는 접어 두기로 했다. 애써 밝은 웃음으로 그의 독사진을 제외하고 모두 종이봉투에 담으려고 하는데 돌연 그가 내 독사진 한 장을 뽑아갔다.
“어?”
놀란 눈으로 그의 얼굴을 보자 그가 다시 예의 그 싱긋 웃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건 내가 가져갈게.”
“하지만….”
“괜찮아. 오래된 책에 꽂아두면 찾아내지 못할 거야. 책을 즐겨 읽는 편이 아니니까. 그리고 나랑은 취향이 달라서 아마 내 책에 손대는 일은 없을 거야.”
“그렇지만….”
“동호회에서 여행 간 거라고 이야기하고 나온 거니까 혹시라도 나중에 무슨 일이 생기면 사진이 섞여서 잘못 왔나 보다고 하지 뭐. 너랑 같이 찍은 사진도 아니니까….”
여전히 불안해하며 말을 잇지 못하는 나를 보고 그는 안심하라는 듯 말했다. 도무지 논리가 맞는 말 같지는 않았지만 그냥 가만히 있었다. 그 일을 막고 싶을 만큼 마음이 불편했던 것도 아니었고 또 왜인지 그가 말한 대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돈가스 접시를 치우고 자리를 옮겨 식당 옆에 카페테리아로 향했다. 여행 내내 그가 돈가스 타령을 했다면 나는 따뜻한 카푸치노 한잔 타령을 했었다. 겨울에 마시는 따뜻한 카푸치노 한잔은 중독성을 띈, 물리칠 수 없는 유혹과도 같은 것이다. 우리는 정해진 코스인양 카푸치노 두 잔을 사서 카페테리아의 작은 식탁 앞에 앉아 홀짝거렸다. 아직 겨울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아니었지만 가을의 막바지라 날씨가 꽤 싸늘했다. 휴게소 창 밖으로 보이는 어둠 속을 육중한 트럭과 수많은 차들이 달리고 있었다. 일회용 종이컵에 든 카푸치노가 너무 따뜻하고 폭신해서 얼어 버린 몸과 마음을 녹이는 듯했다.
“우리 언제 또 만나지?”
“글쎄…. 또 만날 수 있겠지? 내 생각엔, 아마도….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것 같은데?” 이번엔 내가 싱긋 웃으며 그를 안심시켰다. 그 말이 그를 정말 안심시켰는지, 과연 그가 나를 다시 만나지 못할까 봐 걱정이 되어 물은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내 마음은 안정이 되었다. 나는 벌써부터 그가 다시 보고 싶어 졌기 때문이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당장은 아니라도 일주일 뒤 혹은 한 달 뒤, 두 달 뒤에라도 내 공허함을 견디지 못할 때 그를 다시 만날 수밖에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하며 견딜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 한구석이 아프긴 하지만 나도 그렇고 그도 그렇고, 이대로 헤어지고 돌아가는 곳에는 자기만을 반기는 생활이 놓여 있으니까 얼마간은 그 생활 속에서 마음 한구석에 진득하게 덮인 먼지를 잠잠하게 가라앉힐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휴게소 밖으로 비치는 어둠을 한동안 응시하다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외투를 걸쳐 입고 차로 향했다. 집 앞까지 태워 준다는 그의 배려에 고마운 마음과 다시 만나기 위해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야 한다는 아쉬움과 가슴 떨림이 한꺼번에 밀려왔다가 사라졌다. 그가 짓는 웃음처럼 서늘하지만 청명한 11월의 하루가 코끝으로 지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