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기억을 쫓는 연체동물 -

7. 몽상



  


  그에게 사진을 전해 주고 난 뒤 시간은 빠르게 흘러 겨울이 되었다. 겨울이 시작되는 것과 동시에 나는 지독한 고열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올해 겨울은 유독 눈이 내리지 않았지만 기온 하나만큼은 그 어느 해 겨울보다도 추웠다. 회사에 하루 동안 월차를 내고 동네 작은 내과 병원에 들러 진찰을 받았지만 병원에서는 별다른 이상 없이 단지 가벼운 감기라고 했다. 하지만 난 분명 밤마다 고열에 시달렸고 아침에 땀에 흠뻑 젖은 채로 눈을 떴다. 밤새 센서가 고장 난 사우나에서 실신 직전까지 갇혀있다가 구출된 것 마냥 몸이 온통 땀에 절어 있었고 축 늘어졌다. 하지만 감기는 아니었다. 몸에서 엄청난 열이 날 뿐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도 아무 이상 없는 것처럼 보여서 난 꼬박꼬박 회사에 출근을 하고 늦도록 일을 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오면 바로 잠자리에 들어 고열에 시달리는 생활을 한 달이 넘도록 했다. 집으로 돌아오면 곧바로 잠자리에 드는 생활을 며칠간 하다 보니 꿈을 꾸는 횟수도 많아졌다. 꿈속에서 난 흠뻑 젖은 뜨거운 몸으로 깨어나곤 했는데 온통 어둡기만 한 방안에 또 다른 내가 유령처럼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꿈인지 현실인지 모를 몽상이 내 모습을 한 육체의 머릿속에서 투영되어 보였다. 그때 내가 본 것이 단지 꿈이었는지 아니면 비과학적으로 밖에 설명될 수 없는 초능력적인 기묘한 현상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지금에 와서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때 내가 나를 통해 본 것은 상실감이라는 이름을 가진 실체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우리 세 명이 모두 그런 감정을 느꼈으리라 생각되지만 결국은 각기 다른 모습을 한 상실감을 지닌 채 열대 우림의 시골길과도 같은 협소한 길을 걸었다. 얼굴을 본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나는 그녀의 상실감마저 느낄 수 있었고, 비록 꿈속에서였지만 지금도 어렴풋하게나마 그것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기억해 낼 수 있다.  




  그때 내가 본 것은 완벽한 상실감이었다.

 무엇이 그토록 나를 소모시켰을까?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꿈속에서 조차 나는 해답을 모른다. 나는 단지 갑작스럽게 던져진 여행길 위에서 내가 느낄 수 있는 감정의 한계를 경험하고 있었다. 여행은 짧은 산행으로 계획되어 있었지만 습관처럼 뒤늦게 여행에 동참한 그로 인해 몇 박 며칠의 여행이 되어버렸고, 우리는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계절을 잃어버린 시골길을 따라 동화책에나 나올법한 차를 타고 가고 있었다. 집에 미리 얘기하지 못하고 나왔기 때문에 불안함 마음도 있었지만 동시에 뭔지 모를 감정에 나는 나 자신을 어쩌지 못하고 있었다. 그건 아마도 이미 접었다고 생각한 그에 대한 감정이 사실은 하나도 수습이 안되었다는 사실을 직시하게 된 것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역시도 오랜만에 만나게 된 나를 스스로도 어쩌지 못한 채 입맞춤하고 싶어 했다. 분명 마음이 저만큼 떠나 있었는데 이런 감정이 다시 생기는 이유는 무엇일까. 타인의 시선은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우리는 우리는 둘 사이에 일어나게 될지도 모를 일이 더 불안했다. 그가 이만큼이나 내 가까이 있는데 완전히 소유하지 못한다는 생각만큼 마음에 큰 상처를 주는 일은 없으리라. 그때 그 꿈속에서 내가 느낀 감정을 다시 떠올릴 때면 내 의식은 번개에 감전된 듯 멍해진다.


*


  우리는 어쩌면 주위의 풍광을 즐겼는지도 모른다. 여행을 있는 그대로 즐기며 돌아다녔을 것이다. 그러고는 늦은 오후 어스름해질 녘, 숙소에 간단한 음식과 술을 사 들고 들어가 침대에 몸을 누인 채 피곤함을 있는 그대로 온몸으로 흡수하며 한숨을 쉬었다. 고개를 돌려 서로의 얼굴을 보자 그가 나에게 "너를 만나면 아무렇지도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 하고 말을 했다. 나는 현재 만나고 있는 사람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그런 말은 필요가 없지 않았을까? 우리는 이미 우리 사이에 놓인 시간의 균열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우리가 서로를 정말 사랑하고 있을까 하는 물음은  필요 없는 것이었다. 지금 이 순간 서로가 함께 있다는 사실 외에 중요한 건 없었다.

 "너를 어쩌지 못하겠어…." 하고 그가 나에게 말했다.

 ‘너를 어쩌지 못하겠어 ….’ 그 말에 숨어 있는 수많은 의미들. 나는 알고 있다. 그 에는 그가 그녀 역시 깊이 사랑하고 있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나는 불쾌하지 않았다. 그 사실은 나에게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그녀 역시 사랑하고 있고 그건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다.

 그가 내 안에 들어온 시간은 아주 짧았다. 짧은 순간과 긴 여운 사이, 그는 몸을 돌려 그녀에게로 갔다. 그의 긴 몸과 하얀 살이 그녀와 결합하는 걸 나는 지켜봤다. 거기에는 아무런 의문도, 원망도, 저항도 없었다. 나의 앞에서 그녀와 거의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몸을 결합하는 그를 지켜보면서 나는 커다란 상실감을 맞보는 동시에 해탈을 느꼈다. 그녀는 연약한 알몸으로 그를 따뜻하게 받아들였다. 그랬으리라 생각한다. 그녀 역시 일말의 불쾌한 감정 섞인 얼굴이 아니었다. 그녀의 뱃속에는 아이가 있었다. 그러한 사실이 그녀를 더욱 따뜻한 느낌이 들도록 만들었다. 그녀는 언제부터 이곳에 있었을까. 나는 미소를 지은 채 그 둘을 지켜보았다. 아무 색채도 없는 미소. 동시에 수천수만의 감정이 뒤섞인 미소. 얼마쯤 시간이 흘렀을까. 기억나지 않는다. 내가 기억하는 마지막 장면은 우리 셋이 열대 우림과도 같은 시골길을 다시 걸어 나오고 있는 장면이었다. 어디로 향해 가고 있었는지는 모른다. 그녀와 내가 앞장서고 그가 한두 걸음 뒤로 따라오고 있었다. 그는 일종의 죄책감이 섞인 상실감을 품은 채 걷고 있었다. 그런 표정이었다. 그럴 필요가 없는 문제였지만 그것이 그가 지니고 있는 상실의 무게였다. 그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나는 그녀에게서 평온한 표정 뒤에 숨겨져 있는 허무를 보았다. 그녀의 뱃속에는 그의 아이가 있었고 그 사실을 그녀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평온한 표정을 지을 수 있었을까? 나는 그 어떤 죄책감도 불안감도 느끼지 않았다. 단지 속이 텅 빈 연체동물이 다시 나의 그림자가 되어 내 뒤를 흐느적거리며 따라올 뿐이었다. 우리 셋은 각자의 길을 걷고 있었지만 그 속에는 상실이라는 덩어리를 지닌 세 명의 그림자가 서 있었다. 나의 두 눈은 그 둘을 보고 있었고 나 자신을 보고 있었다. 너무나도 공허해서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눈이 슬픔이라는 시공간을 표류하고 있었다.




  몽상은, 항상 거기에서 끝이 났다. 그리고 유령과도 같은 나의 존재는, 내 앞에 긴 여운을 남긴 채 어둠 속으로 사라졌고 나는 흠뻑 젖은 몸으로 잠에서 깨어났다.

이전 12화 1998년의 파란 방 -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