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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쫓는 연체동물 -

8. 부조화 그리고 어두운 새벽녘의 치료



  한 달 동안 반복된 똑같은 꿈과 고열로 체중이 5kg이나 빠져 의도하지 않게 다이어트를 한 격이 됐다. 꿈은 이제 더 이상 꾸지 않지만 어쩐지 빈 껍데기만 남은 채로  거리를 활보하는 느낌이 들었다. 목이 긴 검은 폴라티 위에 두꺼운 더플코트를 걸쳐 입고 나온 거리는 영하의 기온에 옷깃을 촘촘히 여미며 빠른 걸음으로 어디론가 향하는 인파로 뒤덮여 있었다. 올 겨울은 눈 한번 내리지 않고 지나가려나, 생각하며 건조하고 차갑기만 한 겨울의 끝을 응시했다. 겨울의 일요일은, 마치 겨울로만 이루어진 나라로 통하는 통로처럼 끝이 없어 보인다. 반나절 내내 집에서 뒹굴기만 한 것도 지겨워 열심히 걸어 보자는 생각에 무작정 거리로 나왔다.  특별히 생각나는 곳도 없어 한 시간 동안 줄곧 걷기만 했더니 발이 점점 아파오기 시작했다. 하는 수 없이 걷기도 포기하고 2층으로 이루어진 은은한 분위기의 스타벅스에 들어가 내가 좋아하는 카푸치노를  톨 사이즈로 주문했다. 다행히 사람이 많지 않아 창이 큰 자리가 드문드문 비어 있었다. 나는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아 카푸치노를 홀짝홀짝 마시기 시작했다. 따뜻한 카푸치노 한잔…. 이번 겨울 내내 눈이 오기만을 바랐다. 하지만 큰 창 너머로 보이는 하늘은 차가운 기운과 무겁고 어두운 빛깔을 띈 채 투명하게 표류하고 있는 내 의식 너머로 반사될 뿐이었다. 손끝으로 전해지는 카푸치노의 따뜻한 기운만이 차갑게 얼어버릴 듯한 내 의식을 필사적으로 녹여 주고 있었다.


  눈이 왔으면 좋겠는데….


  커피 숍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눈이 오거나 말거나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듯 거만한 표정으로 다리를 꼬고 앉아 무료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거나 무심하게 창 밖을 쳐다볼 뿐이었다.


  아아, 지치는구나 하는 생각.

 

  문득 온몸의 기운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커다란 스펀지에 물이 스며들 듯 엄청난 피로감이 몰려와 그대로 커피 탁자에 머리를 기댔다. 엄청난 잠의 마력이 또다시 나를 덮치기 시작했다. 나는 가방을  주섬주섬 챙기고 나와 무거운 몸을 이끌고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옷도 벗지 않은 채 침대 위에 몸을 던졌지만 이번에 잠은 생각만큼 나를 빨리 삼키지 않았다. 한 시간 정도 자리에서 계속 뒤척이다가 겨우겨우 잠이 들었지만 썩 유쾌하지 않은 기분으로 2시간 뒤에 눈을 떴다. 잠을 잤다는 개운함 보다는 끝이 보이지 않는 무의식의 세계에 갇혀 몇 시간 동안 바둥대고 나온 것처럼 온몸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멍한 의식으로 다시 잠을 청하려는 사이 거실 밖 테라스에서 무언가 비밀스러운 소리가 났다.


  고요한 소리다.


  나는 잠에서 덜 깬 어중간 한 자세로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흐리터분한 머릿속이 맑게 개는 느낌. 소리에 이끌려 테라스로 나가보았다. 까만 새벽의 어둠 속에서 하얀 눈이 소복이 내리고 있었다. 자그마한 눈이 너무나도 조심스럽게 땅 위로 내려앉고 있다. 어둠 속에서 고요하게 내리는 눈을 보자 오늘 하루의 일들이, 그다지 멀지 않은 과거의 일들이 왕조실록에 또박또박 정렬되 있는 한자 마냥 자리를 잡아갔다.


  새까만 어둠이, 고요한 소리가 날 달랜다.


  모두가 잠들고 사라진 밤에 나를 달래주는 존재가 있다는 것은 나에게 위안을 준다. 나와 소리라는 존재. 내가 점점 의식을 잃고 혼곤한 잠 속으로 빠져들 때까지 내린 눈은 나의 지친 몸뚱이에 차갑고 연한 살을 붙여주었다. 기분 좋은 어루만짐. 아침에 일어났을 땐 전날의 연체동물은 아마 약간 진화를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오랜만에 빠져드는 깊고 따스한 잠 속에서 잠깐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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