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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의 파란 방 -

5. 성수동 Twilight



  '여행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았던 게 뭐야?'

 성수동의 허름한 단칸방바닥에 엎드려 누운 채 그를 보며 나는 속으로 물었다. 그는 콘크리트 마감이 그대로 드러난 벽면에 등을 기댄 채 앉아 자신의 재산 1호 중 하나인 후지쯔 노트북으로 무언가를 열심히 보고 있었다. 아마 최근에 완전히 빠져들었다는 존 콜트레인의 연주를 찾고 있거나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간을 파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의 성격에 새로운 일자리를 찾거나 여기보다 조금 더 나은 자취방을 찾을 리는 만무했다. 그가 내 말을 들었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내 멋대로 대답하기로 했다.


 "어스름한 밤의 향내음. 수덕사로 이어지던 희미한 불빛들. 입구 상점가에서 배경음악처럼 흘러나온 불경 외는 테이프 소리. 아무 말 없이 각자 등에 뒷짐을 진 채 향해 갔던 수덕여관. 바람 불면 금방이라도 넘어갈 듯 부실했던 방문 너머 아침의 목탁소리, 사람들의 웅성거림. 아침에 먹었던 산채 나물 정식. 여관에서 났던 땔감 타는 냄새. 저벅거리는 발소리. 담배연기......"

 노트북 화면 위에서 바쁘게 움직였던 그의 눈이 상황파악을 하려는 듯 잠깐 멈추더니 납득이 되었는지 나를 쳐다보았다.

 "여행이 많이 좋았나 보구나?" 그가 으쓱해져서는 싱긋 웃으며 되물었다.

 "혼자 착각하기는." 어이가 없어진 나는 코웃음을 쳤다.

 "빨리! 어떻게 할 거야? 이런 곳에 계속 있을 생각이야? 이건 방이 아니라 거의 폐가 수준이라고!" 나는 상체를 일으켜 세워 양반다리를 하고 앉은 채 그를 향해 따지듯 물었다.

 "왜? 방세도 싸고 좋구먼. 좀 허름하긴 하지만 지낼 만 한데 뭘 그래? 벌써 6개월치 계약까지 했는데?"

 "이런 방을? 6개월이나? 방이랑 부엌 구분 없이 죄다 콘크리트 칠이 돼있고 화장실은 구석에 처박혀 있고 샤워를 하려면 변기 옆에 쪼그리고 앉아 씻어야 하는 곳을?"

 "그러니까 싼 거 아니겠어? 어디 가서 이만한 가격에 이만한 곳도 못 구한다고."

 "그거야 이만한 곳이 여기밖에 없으니 그렇지!" 그는 내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웃음을 흘리기만 했다.

 

  여행을 다녀온 후 나는 휴일만 되면 그의 월세방으로 찾아갔다. 그건 아주 당연한 일이 되어버렸다. 그는 아직 일자리를 구하기 전이었고, 애인과도 수개월 전에 헤어졌다고 했다. 이 세상 모든 연인들이 그렇듯, 술을 마시거나 어쩐지 기분이 센티해지는 날에 습관처럼 걸려오는 전화는 있었다. 그는 파란 방에서처럼 전화를 받았고, 아주 오랫동안 조용히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그 사이 나는 잠깐 월세방 주변을 산책하거나, 화장실에 가는 척 자리를 비켜주었다. 그가 구한 월세방 주변에는 비슷한 느낌의 월세 놓는 집들이 많았다. 나는 콘크리트 돌담 사이에 핀 노랗고 작은 꽃들을 보며 주변을 산책했다. 나는 개의치 않았다. 이미 파란 방에 있을 때부터 그랬었다. 나와 그의 관계는, 뭐라 설명할 수는 없지만 분명 일반적인 연인이라고 할 수 있을만한 그런 것이 아니었다. 우린 연인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썸을 타는 관계도 아니었다. 굳이 그런 류로 구분을 한다면 썸을 타는 단계는 이미 지났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연인은 아니다. 그보다는 친구에 가깝다. 하지만 우린 서로에게 100퍼센트의 남자친구이자 여자친구였다. 이를테면 그냥 그렇다는 것이다.


  "이번 여행 정말 좋았어? 그치?" 그가 다시 노트북으로 시선을 옮기며 물었다.

 "뭐, 나쁘지 않았어." 나는 어쩐지 백 퍼센트 수긍하고 싶지가 않아서 대충 둘러댔다.

 "그건 좋다는 얘기네. 넌 언제나 너무 좋을 때 그렇게 대답하니까. 음, 맞아."

 "뭐야, 혼자서. 나쁘지 않다는 건 말 그대로 나쁘지 않다는 거야.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닌 그 어디쯤."

 그가 다시 노트북 화면에서 눈을 뗐다. 이건 좋지 않은 징조다. 뭔가에 열중해 있던 그가 그곳에서 두 번 눈을  뗀다는 것은 집중력을 방해받았다는 뜻이다. 그리고 집중력을 방해받은 그는 그게 누가 되었든 옆에 있는 사람을 괴롭힌다.

 그가 눈을 장난스럽게 흘기고는 입가에 웃음을 띤 채  상체를 쭉 뻗더니 내 등 위로 자기 몸을 포갰다. 담요 한 겹 너머로 그의 차가운 살결이 느껴졌다. 그가 가슴 밑으로 팔을 두른 채 나를 꼭 껴안았다.

 "안돼! 나 이제 가봐야 해." 그에게 저항하며 몸부림치자 그가 내 목덜미 위로 고개를 파묻었다.  

 "조금만 이대로 있자.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을게 응?"

 목덜미 사이로 그의 뜨거운 숨결이 느껴졌다. 그러자 터무니없게도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는 생각. 나는 저항을 멈추고 그를 향해 돌아누웠다. 그러고는 그의 목 뒤로 팔을 두르고 입술을 포갰다. 입안에서 차가운 얼음사탕이 굴러갔다.

 "지금 이 순간." 그가 내 입안에 뜨거운 숨결을 내뱉으며 웅얼거렸다.




  콘크리트가 두껍게 발린 벽에 조그맣게 나있는 밖으로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이렇게 달콤한 순간은 항상 해가 넘어갈 생길까, 하는 의문. 나는 어스름할 녘의 하늘을 좋아하지 않는다. 어스름한 하늘은 나에게 불안감을 안겨준다. 돌아가야 때야, 하고 누군가 나지막하게 속삭인다. 어디론가 돌아간대도 나는 그곳에서 위안을 얻지 못하는데, 그와 함께하는 이 백 퍼센트의 순간에도 왜 불안감은 옷장 뒤 음침한 구석 도사리는 곰팡이처럼 때를 놓치지 않고 번져 나가는  것일까. 나도 누군가처럼 고양이를 불러야 하는 것일까? <나를 진정시켜 다오> 하고 어느 유령한테 이야기를 건네야 할까? 나는 고양이 알레르기가 있으니 그 유령은 분명 고양이는 아닐 텐데.


 "<나를 진정시켜 다오>." 나를 껴안고 곤히 잠든 그의 얼굴을 보며 이야기를 했다. 그가 자는 사이에 그의 휴대폰은 몇 번인가 울렸다가 꺼지기를 반복했다. 휴대폰 화면에 검은 단발머리가 바람에 날리지 않도록 단정하게 귀밑으로 쓸어 넘기는 그녀의 모습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그녀도 그를 통해 진정되기를 바라는 것일지도 모른다. 잠결에 내 목소리가 들렸는지 그가 몸의 뒤척이다 나를 더 꼭 끌어안았다. 문득 이제 그만 돌아가야겠다는 생각.

 '가을이 겨울에 그 자리를 내주려고 하고 있다.'  연체동물이 속삭였다. 허름한 단칸방 콘크리트 벽에 뚫린 작은 창가를 맴돌며. 한동안 모습이 보이질 않았었는데....


  생각해 보면 연체동물은 그동안에도 계속 내 주위에 있었다. 파란 방을 떠나고 난 후 연체동물은 얌전한 고양이처럼 내 옆구리에 똬리를 치고 누워 한동안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연체동물이 잠들어 있을 때는 모든 것이 덩달아 멈췄다. 내 마음도 멈춰버려서 나는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했다. 모든 것이 평온했다. 행복감은 없었지만 나는 그 평온함이 다행스러웠다. 하지만 평온함에 잠식되어 있기에 내 몸뚱이는 지나치게 본능적이었다. 나는 허기를 느꼈고, 생리현상을 어쩔 수 없었고 무엇보다 하루가 멀다 하고 학과실에서 전화가 와서 마지막 학년의 졸업논문을 어느 실험실에서 쓸 건지 정하라고 닦달했다. 연체동물은 슬금슬금 일어났고 시계는 묵직하게 소용돌이치는 타르 용액처럼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름이 되었고, 그를 다시 만났다. 연체동물은 한동안 조용한 것 같았다. 아니, 행복해하고 있는 건가 싶기도 했다. 연체동물은 가볍게 하늘을 표류했다. 나는 연체동물이 자유롭게 하늘을 날아다니도록 내버려 두었다. 가끔은 이대로 더 높이 날아서 내 시야에서 사라졌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연체동물은 돌아왔고 그리고 지금 나에게 말하고 있다. 해가 지려 하고 있다.

 

  파란 방에서와는 다르게 나는 그에게 메모를 남기기로 했다. 나를 끌어안고 있는 그의 팔을 조심스럽게 풀고 그 사이에 베개를 끼어넣고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가방을 뒤져 노란 포스트잇을 꺼냈다.


  안녕


  나는 노란 포스트잇을 그의 후지쯔 노트북 케이스에 붙이고 월세방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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