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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소연

직업 때문에 생기는 편견들




사람들에게 번역하는 일을 직업으로 하고 있다고 하면 공통적으로 보이는 반응들이 있다.


"정말요? 능력이 좋으시네요. 책도 많이 읽으시겠어요."

그럴 때마다 나는 멋쩍게 웃으며 말을 흐리는데 머릿속으로는 한숨을 내쉬고 있다.
'에휴, 아닌데. 능력도 안 좋고, 책은 더더군다나 더 못 읽는데."

 능력이 부족해서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번역을  때 책을 전혀 못 읽는다. 지금도 회사에서 간단하다면서 맡겨준 연재만화를 번역하고 있지만, 번역하는 두 달 내내 책을 한 권도 읽지 못했다. 그건 어쩌면 내 성격 때문이거나 엄마라는 내 역할 때문인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나는 번역을 하는 동안 번역에 관련된 자료 외에 다른 책에는 전혀 집중을 못한다. 다른 책을 읽는다 치면 그날 마무리지어야 할 번역 분량 생각 머릿속 이미 포화상태다. 책 읽는 속도가 느린 내 성격 탓도 있으리라….

언젠가 교보문고에 갔다가 독서법이라는  -그런 종류의 책이었던 것 같다-  책을 본 적이 있다. 책 읽는 속도가 워낙 느린 탓에 어떻게 해야 책을 효율적으로 빨리 읽을 수 있을까 하여 그 자리에 선 채로 책장을 펼쳤는데 2분도 지나지 않아 책을 내려놓았다. 서문부터 저자는 책을 느리게 읽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정독의 저주에 걸렸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작가는 책을 느리게 읽는 것속도의 문제가 아니라 정독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생겨난 습관이라고 말하면서 단호하게 한 가지 결론을 내려주었다. 기억으로는 아마도, 책에서 무언가 인상적인 것 하나라도 남았다면 그 독서는 성공한 것이라고 정리를 해주었던 것 같다. 저자는 모든 책을 꼼꼼히 읽을 필요가 전혀 없다고 하면서 필요한 것만 쏙쏙 뽑아 읽고 여러 번, 여러 권의 독서로 지식의 큰 틀을 세우고 내용을 채워 넣으라고 말했다. 그러면 빼먹고, 건너뛰고, 넘어가는 부분이 생긴다는 말인데 나는 어쩐지 그렇게 하는 것이 망설여진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읽은 한 줄 한 줄을 모두 기억하고 그 안에서 어떤 울림을 느낀다는 말은 아니지만, 나는 기본적으로 책을 읽을 때, 각 행을 따라 눈을 움직이고 머릿속으로 언어를 발음하고 그러다가 어떤 단어 혹은 문장에서 숨을 멈추다가, 다른 생각에 잠기 다시 현실로 돌아와 내가 읽었던 행을 더듬어 찾기를 천성적으로 편안하게 여기는 타입이다. 내가 읽은 모든 행을 기억하고 그 안에서 지식을 얻고 지혜를 얻고자 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렇게 할 수도 없다-. 내용이 한참 재미있어지는 순간에 돌연 읽기를 멈추고 일어나 끓어 넘치는 찌게 냄비의 불을 꺼야 할 때도 있고, 뒤돌아서면 엄마를 찾는 아이가 있어 모든 행을 기억하고 그 안에서 의미를 찾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감기는 눈꺼풀을 간신히 치켜뜨면서 돌연 중단되었던 행을 찾아 페이지를 뒤로 넘기는 까닭은 혹여라도 뛰어넘어간 부분에서 풍기는 분위기를 놓칠까 하는 염려 때문이다. 나는 작가가 책을 쓸 때자신이 의도했던 방향으로 이야기를 이끌어나가기 위해 아무리 사소한 부분에라도 어떤 낌. 새. 를 심는다고 생각한다.


반면 일을 하면서 읽게 되는 책은 조금 다르게 접근한다. 우선은 마감이라는 시간적인 제약 때문이기도 하지만, 아무래도 일과 연결이 되다 보니 내가 필요한 부분만 콕콕 집어서 읽게 된다. 앞뒤 정황 전혀 없이 내가 필요한 내용만 간추리다 보면 가끔은 전혀 다른 내용, 잘못된 방향으로 이해하기도 해서 번역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때도 있다.  그럴 때는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싶을 정도로 부끄러워진다 - 다행히 출간으로까지 이어진 적은 없지만 -. 이야기가 잠시 옆길로 샜는데, 나의 이 느린 독서 습관 때문에 나는 번역을 할 때 책을 전혀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읽지 못한다. 이번 번역을 들어가기 전에 샀던 10여 권의 책이 책장에 꽂힌 채 세월아 네월아 나만 바라보고 있다.


책 읽기가 느려서, 다시 말해서 어떤 것을 받아들이는 속도가 느리기 때문인지 몰라도 나는 번역가는 똑똑할 거라는 사람들의 생각과도 한참 동떨어져 있다. 단편적인 지식들로 치자면 어쩌면 다른 사람들에 비해, 그 다른 사람의 기준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참으로 아리송하긴 하지만,  단위 시간당 접하는 지식의 양이 많을는지도 모른다. 나는 아침에 일어나 아이를 챙기는 와중에 일간신문을 틈틈이 듬성듬성 읽고, 신문의 사설란을 비교적 꼼꼼하게 챙겨 읽으며 -최재천 교수의 글은 언제나 옳다- 생각이 날 때마다 내가 제3의 뇌라고 부르는 스마트 폰을 꺼내 들어 네이버의 경제란과 이슈들을 훑어본다. 길을 가다가도 스쳐 지나가는 문구나 광고를 훑어보게 되는 것은 아마도 내 직업 때문에 생긴 습관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나는 번역을 하면서 필연적으로 마주할 수밖에 없는 수많은 지식들을 짧은 시간 안에 머릿속에 나노 단위로 채워 넣는다. 그래서인지 오전의 번역 일정이 마무리되면 머리가 지끈지끈 아플 때가 많다. 뇌의 한계용량이 다 된 것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이렇게 받아들인 지식들은 번역 하나가 마무리될 때마다 머릿속에서 소리 소문 없이 증발해버린다. 남는 것이 정말로 하나도 없을 정도인데, 한참이 지난 뒤에 옛날에 했던 번역서를 펼쳐 들고 '내가 이렇게 번역을 했단 말이야?'하고 생각할 정도이다. 어떤 연유로 해서 내가 그 문장을 그렇게 번역했는지에 대한 기억은 깡그리 사라지고 없다. 문학서라면 그래도 나은데, 지식서 같은 경우에는 내가 번역한 내용인데 완전히 새로운 내용을 읽고 있는 양 감탄하게 된다. 내가 번역한 책을 읽고 "엄마 그거 알아? 찡그리는 게 웃는 것보다 더 쉽다는 거?" 하고 물어보는 아이에게 "정말? 왜?" 하고 물어보는 일이 다반사다. 일이 이렇게 되다 보니 번역가는 똑똑할 거라는 사람들의 생각에 나는 전혀 동의를 못하겠다.


남편이 나에게 자주 하는 말 가운데 하나가 "번역을 하면서 그런 말도 몰라?"이다. 어휘력이 다른 사람에 비해 월등히 좋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지, 내가 사자성어 앞에서 말문이 막히거나 영어 단어의 뜻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횡설수설 면 남편은 나에게 "너 번역하는 사람 맞아?" 한다. 나도 참 난처하고 부끄럽지만, 정말이지 어쩔 수가 없다. 어떤 단어나 현상을 설명하거나 표현하는 일이 또는 반대로 단어로 압축하는 일이 내게는 너무나도 어렵고 힘든 일이다. 옆구리를 찌른다고 바로 나올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일이 아니다. 어찌 보면 다른 사람에 비해 상식도 떨어지고 현실감각은 더더욱 없다. 요리도 느리고, 집안 일도 느리며, 외출 준비는 더더욱 느리고, 그 세 가지를 연이어서 할라치면 제 풀에 지쳐 손을 놓아버리게 된다. 모든 번역가가 그런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럴 리가, 적어도 나라는 날라리 번역가는 그렇다. 토익 점수마저 내세우기 부끄러운 날라리 번역가다. 


그럼에도 내가 번역을 하는 이유는, 이 일을 놓지 못하는 이유는 -물론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 하나를 꼽자면- 문장을 완성할 때의 만족감 때문인 것 같다.  똑똑하지도 않고 책도 많이 읽지 못하는 내가 여러 가지 의미로 쓰일 수 있는 다른 나라의 언어를 이리 살피고 저리 살펴서 가장 알맞은 우리나라 말을 찾아내어 하나의 문장으로 완성할 때의 그 만족감. 그리고 그 문장들이 한 권의 번역서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보게 될 때, 얼굴에 감출 수 없는 만족감이 퍼져나간다. 베틀로 아름다운 천을 짜는 사람이, 집을 짓는 사람이, 밥상을 차리는 요리사가 이런 기분을 느끼겠지 하고 어렴풋이 공감해본다. 그 사람들 역시 그다지 책을 많이 읽지 않고 그다지 똑똑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들의 손끝에서 탄생한 소산물만큼은 '완전'을 지향하는 집합체임에는 틀림없다.


그렇게 생각해도 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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