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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플리의 장동맥

by 느릿느릿 아줌마와 나무늘보



그녀는 살짝 찢어진 장동맥을 상상했다. 의사가 대장이라고 했으니 아마 모두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인체 해부도의 배 둘레로 네모나게 자리 잡은 그 기관이겠지. 굵직굵직한 주름이 진 채로 뱃가죽 바로 아래 똬리를 튼 대장을 상상하자 자연스럽게 전 세계적으로 히트를 친 SF영화 에일리언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여주인공 리플리가 수화물 창고 안을 가득 점령한 여왕 에일리언의 탯줄에 대고 화염방사기를 발사하는 장면이었다. 빨간 핏줄이 그물처럼 감싸고 있는 투명한 탯줄에서는 에일리언의 알이 꿀렁꿀렁 미끄러져 나온다. 그녀의 장동맥도 대장이 제 기능을 할 수 있도록 열심히 자양분을 공급하고 있다. 그녀는 배에 가만히 손을 올리고 동그랗게 쓰다듬었다.


의사는 대장을 감싸고 있는 빨간 장동맥에 살짝 스크래치가 났다고 했다. 그 뒤 세 달 동안 그녀는 거의 미음만 먹으며 지냈다. 장동맥이 아물 때까지 자극적인 음식을 최대한 피하라는 것이 의사의 소견이었다. 하지만 세 달 동안의 강제 다이어트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장동맥은 아물 기미가 없었다. 계속 미음이나 흰 죽을 먹고살 수는 없기에 의사는 그녀에게 수술을 권유했다. 급하지는 않지만 혹시 모를 위험을 없애자는 게 의사의 말이었다. 혹시 모를 위험. 그녀는 의사가 그 문장을 내뱉었을 때의 입모양을 떠올렸다. 의사가 그녀의 뱃속이 환하게 드러난 CT사진을 컴퓨터 화면에 띄운 채 혹시 모를 위험이라고 말하니, 심장이 마구 뛰기 시작했다. 그녀의 심장이 의사의 입 밖으로 나올 것만 같았다. 그녀는 멍한 표정이 되어 CT사진과 의사를 번갈아보며 영혼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장동맥이 완전히 찢어지면 어떻게 되나요?”

“제가 굳이 어떻게 된다고 말하지 않아도 아마 환자분 본인이 가장 먼저 알아차리게 될 거예요. 엄청난 복통이 뒤따를 테니까요. 환자에 따라서는 요통을 먼저 수반하는 경우도 있는데, 지금 보니 환자분이 응급실에 내원한 경위가 요통 때문이었네요. 물론 환자분 같은 경우는 허리 디스크가 기저 질환으로 있기는 하지만 요통의 원인이 꼭 허리 디스크 때문만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장동맥이 제 기능을 못하게 되면 가볍게는 소화불량에 헛구역질이 나거나 변 모양이 좋지 않고, 가벼운 요통에서 극심한 요통을 동반하기도 하거든요. 가장 심한 것은 장동맥이 완전히 파열되면 그때는 늦을 수도 있다는 겁니다.”

그녀는 늦을 수도 있다는 말이 어떤 의미일까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어떤 의미인지 묻지는 않았다. 이상하게도 그녀에겐 늦는다는 말이 혹시 모를 위험보다 훨씬 안전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진찰실에 들어간 이후 처음으로 차분한 표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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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놓고 싶어서도 내려놓지 못해서도 아니었습니다. 되돌아보니 그저 좋아 썼습니다. 가장 나다울 수 있는 행위이기에 글을 씁니다. 그 종착이 타인을 위한 글쓰기이기를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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