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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와 삼계탕

by 느릿느릿 아줌마와 나무늘보



그녀는 거대한 코끼리를 생각했다. 코끼리는 몇 달 전부터 그녀 앞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저녁 장을 보기 위해 시장 입구에 들어서는데 코끼리가 입구를 막고 서서 그녀를 쳐다보았다. 처음에 그녀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큰 시장도 아니다. 주변 상인회에서 기획해 금요일 오후마다 반짝 하고 여는 동네 장이다. 금요일 매출을 어떻게든 살려보자는 상인들의 피나는 노력이었다. 인도 뉴델리나 아프리카 어딘가에서 열리는 시장이라면 어느 정도 납득이 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곳은 인도나 아프리카가 아니다. 그녀는 팔을 들어 장바구니를 한 번 쳐다보고, 다시 코끼리가 나타난 시장 골목 입구로 눈을 돌렸다. 이번에는 코끼리의 엉덩이가 보였다. 코끼리는 그녀를 한 번 뒤돌아보고는 큰 귀를 팔락거리며 시장 골목 안으로 걸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느리지만 무게감이 느껴지는 걸음걸이다. 자세히 보니 짧은 꼬리를 살짝 흔들기까지 했다. 그녀는 그 자리에 꼼짝 않고 서서 코끼리가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 뒤 코끼리는 수시로 그녀 앞에 나타났다. 퇴근하고 돌아와 현관문을 여는 데 코끼리가 거실 한가운데 덩그마니 서 있던 적도 있었고 회사 동료들과 함께 아이디어 회의를 하는 데스크 위에 뜬금없이 나타난 적도 있었다. 언젠가는 상사에게 업무보고를 하는데 코끼리가 상사 뒤편에 있는 큰 통유리창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코끼리는 언제나처럼 큰 귀를 팔락거렸고, 짧은 꼬리를 느긋하게 흔들고 고개를 돌려 곁눈질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결국 그날 그녀는 재앙에 가까운 수준으로 업무보고를 마쳤고 오후 병가를 내 집으로 돌아갔다. 코끼리는 그녀가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그녀를 뒤따라왔다.


병원을 가볼까 생각했다. 아무래도 코끼리가 다른 사람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코끼리는 그녀의 눈에만 보였고, 코끼리가 나타날 때마다 눈이 점점 커지는 그녀를 보고 동료들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괜찮냐고 물었다. 코끼리가 정말로 자기 눈에만 보이는 것인지 확인하기 위해 수를 쓴 적도 있었다. 속옷 가게에서 점원과 이야기를 나누는데 코끼리가 나타났길래 그녀는 곁눈질로 코끼리에게 피팅룸 안으로 따라오라고 말했다. 그녀는 속옷을 살 때 피팅을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점원이 따라오는 것인 줄 알 리가 없었다. 하지만 피팅룸 안에는 거울이 있고, 코끼리가 다른 사람들 눈에도 보이는 것이라면 거울에도 비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녀의 예상대로 코끼리는 거울에 비치지 않았고, 그녀는 난생 처음으로 처음 만난 사람에게 그녀의 가슴을 드러내보였다. 코끼리는 난처한 표정으로 브레이저 후크를 직원에게 맡기는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볼 뿐이었다.


“코끼리가 언제부터 보이기 시작했나요?” 하얀 데스크 뒤에서 팔짱을 끼고 앉은 의사가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두 달 전부터였던 것 같아요.”

“그 당시 일을 기억할 수 있나요?”

“코끼리가 나타났을 때 일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의사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고개를 오른쪽으로 살짝 기울인 채 생각에 잠겼다. 의사가 요구하는 그.당.시. 의 범위가 너무 커서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얘기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시장에 가던 중이었어요. 시장 골목 앞에 섰는데 코끼리가 보이더라구요.” 그녀가 입을 열었다.

“시장이라.... 그 당시에 뭐 특별한 일은 없었나요? 이를테면 부부싸움을 크게 했다던가 아니면 주변에 누군가 돌아가셨다거나, 시장으로 가는 길에 큰 사고를 봤다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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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놓고 싶어서도 내려놓지 못해서도 아니었습니다. 되돌아보니 그저 좋아 썼습니다. 가장 나다울 수 있는 행위이기에 글을 씁니다. 그 종착이 타인을 위한 글쓰기이기를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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