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3시, 그녀는 핸드폰을 계속 들고 있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벌써 40분 째다. 오후가 송두리째 날아간 기분이다.
‘끊을까? 다시 전화가 올 텐데. 안 받으면 되지. 일이 어떻게 되던, 알 바인가. 지친다.’
그녀는 S의 말 바꾸기에 지쳐버렸다. S를 이해해보려고 한 적도 많았다. 나쁜 의도는 아닐 거라고, S는 어쨌든 나보다 인생 경험이 많고, 가족이니까. 무슨 나쁜 의도가 있을까? 주변에서 S의 말하는 태도가 너무 불편하다고 해도, 그녀는 S의 편을 들었다. S가 누구처럼 말을 자기 유리한 쪽으로 바꾸는 버릇이 있다고 해도, 그녀는 그렇게 말한 사람이 오히려 무슨 꿍꿍이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S를 믿었다. 그녀 역시 S에게 고개를 갸웃하게 되는 순간이 많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가족을 의심한다는 건 자기 살 파먹기니까. 오늘처럼 S가 전화기에 대고 주절주절 항변하는 날에는 더더욱 모든 것이 그녀가 잘못 오해해서 생긴 일이 되어버렸다.
처음에 그녀는 S가 그런 성격이 된 것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어쨌든 S는 홀로 세상의 험한 풍파를 헤쳐 나가며 아이를 키워야 했고, 친정에서조차 위안이나 지지를 얻지 못했다. 애초에 누군가에게 위안을 주고 지지를 할 수 있는 울타리가 아니었다. 그녀는 그 사실을 일찍부터 깨닫고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 그녀는 친정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 조용히 살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었다. 하지만 친정은 바람 잘 날이 없었고, 그 바람은 언제나 광풍이었다. 친정은 언제나 받는 쪽이었고, 혹여 무언가를 내준다 한들 그 뒤에 치러야 할 대가가 너무 컸다. 그런 환경이다 보니 홀로 아이를 키워야 했던 S로서는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버려졌다는 생각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S는 자신과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세상을 향해 가시를 세워야 했고, 그 가시는 언제나 날카롭게 연마되어 있어야 했다. 날마다 누군가를 향해 가시를 세우는 인생은 결국 자기 자신마저 갉아먹는다. 누군가를 향해 가시를 세우는 인생이든, 가시는 없더라도 그 누구도 침범하지 못할 정도로 높은 벽을 쌓는 인생이든 별다를 바 없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누구나 인생에는 아픈 이유가 있다. 그녀는 S를 그렇게 수용하려 했다. 하지만 인생은 그녀의 생각이 오만하다고 비웃기라도 하듯 그녀를 농락했다.
시작은 별 것도 아닌 서류에서부터였다. S는 호들갑을 떨며 그 서류를 찾았고, 그녀도 도움이 될까 싶어 찾아보겠다고 나섰다. 하지만 밤새도록 찾아도 서류가 나오지 않자 그녀는 미안한 마음으로 S에게 서류를 찾지 못했다고 전화했다. S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어차피 두 부가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왜 처음부터 두 부가 있었다는 사실을 얘기하지 않았느냐고 S에게 물었고 S는 자신이 얘기했었다고 우겼다. 결국 그녀는 자신이 전화 내용을 제대로 듣지 못한 것으로 -그럴 리가 없었지만 - 이야기를 일단락 지어야 했다. 서류 한 장 때문에 그녀와 S사이에 미묘한 기류가 흐르는 게 싫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얼마뒤 S가 이야기를 둘러댄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서류를 이미 친정에 전달하고 왔다고 한 S의 이야기와 달리, 친정에서는 그 서류가 애초에 친정집에 있었다고 알려주었다. 원래 있던 서류를 어머니가 찾지 못해 S에게 얘기한 걸, S가 호들갑을 떨며 친정을 들락거리는 요양사를 의심했고, 요양사를 의심하고 싶지 않았던 그녀는 혹시 자기에게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가능에 가까운 가능성에 초점을 두고 밤새도록 찾았던 것이다. 서류는 다음날 아침 어머니가 찾아냈고, 곧바로 S에게 전화해 알렸다고 했다. 결국 S는 서류가 두 부 있었다는, 할 필요도 없는 거짓말을 그녀에게 한 것이다.
‘왜일까? 왜 그런 불필요한 거짓말을 하는 거지? 내가 밤새도록 찾은 게 미안해서?’
그녀는 S가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께름칙한 기분은 쉬 지워지지 않았다. 그녀는 불현듯 또 다른 서류가 궁금해 어머니께 물어보았다. 어머니가 부재해 있을 때 함께 사라졌던 서류였다. 그녀는 언젠가 S에게 혹시 서류를 가지고 있느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그때 S는 어이가 없다는 듯 자기가 가지고 있을 리 있겠느냐고 되물었었다. 몇 번이고. 그런데 며칠 전 통화에서 S는 서류가 없다고 말한 걸 잊은 모양인지 서류를 어머니께 전해주었다고 했다. 그녀는 어머니께 S가 서류를 돌려주었느냐고 물었고 어머니는 아직 S에게 서류를 받지 못했다고 대답했다. 서류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도, 어머니께 돌려주었다는 것도 모두 거짓이었다. 도대체 왜일까? 그녀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혹시나 서류에 대한 이야기가 아버지 귀에 들어갈까 걱정돼 S가 말을 둘러댄 것일지도 모른다고 S를 두둔했다. 그래, 그럴 수 있다. 이해한다. 하지만 만일 그렇다면 그 말인 즉 S가 그녀를 믿지 못한다는 뜻이다. S가 그녀를 믿었다면 있는 그대로를 얘기하고 입단속을 당부했을 것이다. 그녀가 밤새도록 서류를 찾았던 것이 미안했다고 해도 사실을 먼저 얘기했다면 그리 미안할 일도 아니었다. S도 일이 그렇게 돌아갈 줄 몰랐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S는 두 번 다 말을 지어냈고, 그것이 밝혀진 지금 전화로 항변 아닌 항변을 하며 모든 것을 어머니 탓으로 돌리고 있다. 어머니가 말을 잘못 전달했고, 그녀가 말을 잘못 알아들었다. S는 잘못한 게 아무것도 없다. 그것이 요점이었다. 그녀는 가만히 핸드폰의 통화종료 버튼을 눌렀다. 이제 그만 됐어. 그녀는 생각했다. 그리고는 싱크대 앞으로 가서 귀뚜라미를 이쑤시개로 꼽아 가스레인지 불에 태웠다. S에게 전화가 걸려오기 전에 싱크대 사이에서 찌르르르하는 소리가 들려 거의 반사적으로 유리컵을 뒤집어 귀뚜라미를 잡고는 전화를 받았었다. 그녀는 왼손으로 유리잔을 살짝 들어 올린 다음 재빠르게 에프킬라를 뿌리고 귀뚜라미가 기절하기를 기다렸다가 이쑤시개로 통통한 배를 찍었다. 귀뚜라미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 채 가스레인지 불에 타들어갔다. 먼저 가느다란 다리가 타고 날개가 타고 몸통이 바짝 마른 검은콩처럼 변하며 탔다.
“미안해. 네 울음소리가 싫은 건 아닌데 말이지, 어쩔 수가 없구나. 네 울음소리는 간지럽고 아름답지만, 정말이지 가을날 듣는 네 울음소리는 감성이 돋거든. 울음소리만큼 네가 깨끗한 곤충이면 좋을 텐데. 나도 정말 안타까워. 더러운 건 어쩔 수 없으니까. 그냥 뒀다가는 깨끗한 것마저 더러워지니까. 너는 스스로 깨끗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 너는 아주 더러운 곤충이란다. 바퀴벌레보다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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