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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스러미

by 느릿느릿 아줌마와 나무늘보


그녀는 불안할 때면 습관처럼 거스러미를 떼었다. 오늘은 입술이다. 그녀는 자신이 불안한 줄 모른다. 혼자 있을 때면 거스러미에 온 신경을 집중하기 때문이다. 거스러미를 만지작거리다 보면 마음이 안정된다. 때로 거스러미는 생각만큼 잘 떼어지지 않는다. 그녀는 더욱 집중한다. 어떻게든 떼어내야 한다. 그녀의 옆집에 여자가 산다. 언제나 단정하고 곧은 모습이다. 그녀는 여자의 모습이 불편하다. 그 흔들림 없는 표정이 거슬린다. 몇 차례인가 여자에게 인사를 했지만 여자는 목에 부목을 댄 것처럼 고개만 까닥하며 인사를 받는다. 먼저 인사한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녀는 여자가 한 번도 불안함을 느껴보지 못했을 거라 짐작한다. 그래 보인다. 자기와는 다르게. 입술의 거스러미가 잘 떼어지지 않는다. 그녀는 손톱을 세워서 입술의 얇은 표피를 정교하게 집어낸다. 거스러미는 보기 좋게 손톱 사이를 빠져나간다. 피는 나지 않았으면 하는데... 딱지가 앉으면 가을까지 거스러미를 떼느라 입술이 남아나지 않을 게 뻔했다. 아무래도 이번 거스러미는 조금 더 뒀다가 단단하게 마르면 다시 떼야할 것 같다. 그녀는 할 일을 찾았다. 뭐든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랫배의 근육이 단단하게 뭉쳐서 온몸이 거목처럼 비틀릴지도 모른다. 그녀는 얼마 전에 산 토마토가 떠올랐다. 아침에 바게트 위에 토마토를 얇게 썰어 올리고 치즈를 얹어서 오븐에 구워 먹을 생각으로 산 것이다. 그런데 토마토 박스가 배달되어 온 순간부터 토마토는 보기도 싫어졌다. 상자를 열어보니 단단하고 신선하게 잘 익은 빨간 토마토가 한가득이었다. 그녀는 상자를 그대로 봉해버리고 냉장고 안에 넣어버렸다. 상하기 전에만 어떻게든 하자. 그렇게 지난 시간이 이 주였다. 그녀는 토마토 상자를 열었다. 입술에는 챕스틱을 발랐다. 토마토 몇 개가 까맣게 멍들어 있었다. 그녀는 토마토 일곱 개를 깨끗이 씻어서 검게 멍든 부분을 칼로 잘라내고 토막을 내서 믹서기에 넣었다. 설탕도 넣고 얼음도 넣은 다음 믹서기를 일단으로 돌렸다. 모터 돌아가는 소리가 시원찮아서 이단은 건너뛴 채 터보로 돌렸다. 토마토가 잘게 갈리면서 분홍빛 과육이 믹서기를 가득 채웠다. 그녀는 믹서기를 통째로 들고 아파트 관리실을 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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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놓고 싶어서도 내려놓지 못해서도 아니었습니다. 되돌아보니 그저 좋아 썼습니다. 가장 나다울 수 있는 행위이기에 글을 씁니다. 그 종착이 타인을 위한 글쓰기이기를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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