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재미있다. 나는 방금 전까지 엄청난 불안에 휩싸였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한 두달 앞으로 나의 인생에 커다란 전환점이, 전환점이라고 불러도 괜찮을 만큼 큰 변화가 생길 것이기 때문이다. 이건 거의 확실한 사실로써 작용한다. 그 변화는 어떤 방향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나의 인생이 불행해질 수도 반대로 행복해질 수도 있다. 불안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물론 나는 적어도 행복해지는 방향으로 가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겠지만, 불행이라는 가능성이 단 1프로라도 있는 이 시점에서 불안하지 않기는 힘든 법이다.
뱃속에 나방이 떼로 날개를 파닥이는 것처럼 간질간질 꿀렁꿀렁한 증세가 세 시간가량 지속됐다. 장사를 해야 하는 상황에서 저 혼자 날뛰는 배를 어떻게 할 도리가 없어 손님이 오기 전에 가만히 자리에 앉아 내 배가 이렇게 된 이유에 대해 냉정하게 생각해 보기로 했다. 과연 이것이 흥분에서 오는 증상인지 아니면 불안에서 오는 증상인지. 삶의 전환점 앞에서는 아무래도 두 가지 감정이 동시에 들기 마련이다. 아무리 작은 전환점이라고 할지라도. 남편이 생전 물어보지 않은 나의 기분을 물어본 걸 보면 남편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나는 앉아서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이 감정이 불안에서 오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흥분보다는 앞으로 내가 감당할 수도 있는 단 1프로의, 하지만 발생하고 나면 인생 전체를 무너뜨릴 수도 있는 위력을 가진 그 불행이라는 녀석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자, 이제 어떡한담. 나는 이미 3년 동안 온몸을 던져 불행을 막아왔었다. 불행은 나의 기세에 가로막혀 앞으로 더디 나가기도 했지만, 어떤 것은 나의 나약한 기세 따위는 아랑곳없이 나를 잠식하기도 했다. 나는 불행에 잠식당한 나를 치유하기 위해 내 안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어떤 것이 나를 두려움에 떨게 만드는지, 어떤 것이 나를 무너뜨리는지. 어떻게 해야 내가 진정이 될 수 있는지.
장 그리니에는 자신의 불안을 고양이 몰루에 투영해 들여다봤다. 하지만 나에게는 고양이가 없다. 애물단지 반려견 토란이가 있지만, 토란이는 나의 불안을 투영할 아이가 아니라 내가 행복하게 만들어줘야 할 아이다. 토란이에게 불안은 독이 된다. 그러니 그 아이에게는 사랑만 심어주는 게 옳다. 나는 나의 불안을 손바닥 위에 놓고 다시 들여다본다. 그 녀석은 나를 농락하며 내 배를 계속 비틀어 쥐어짠다. 살면서 이 녀석을 없애는 일은 아마 불가능에 가깝지 않을까. 대신 살살 달래 재울 수 있는 방법은 분명히 있어 보인다. 그리고 참 신기하게도, 하지만 새삼스럽지도 않게 나의 불안은 키보드와 하얀 백지와 검은 활자를 마주하는 순간 얌전해졌다. 가까스로, 깊은 한숨이, 내쉬어진다.
키보드가 말썽을 피우는 하얀 노트북에 전원을 켜고, 딸아이와 함께 릴레이 형식으로 이어쓰기로 한 소설 파일을 열어 딸이 이어 쓴 글을 읽는다. 불안이 연못 아래 가라앉은 부유물처럼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한다. 어느 정도 무게감 있게. 미친 망나니처럼 날뛰었던 배가 진정된다. 나는 딸이 이어 쓴 소설을 읽으며 감탄한다. 이 뒤를 어떻게 이어 쓴담, 고민한다. 딸아이의 필력에 부끄럽지 않은 엄마가 되고 싶다. 소설은 잠시 마음속, 아직은 오염되지 않은 흙 속에 묻어 묵혀두기로 한다. 글에 걸맞은 문장이 떠오르려면 잠시 그런 시간이 필요하다. 대신 다른 파일을 열어 무엇이든 써보기로 한다. 그게 지금이다. 나는 참 재미있다는 문장으로 시작을 끊는다. 진짜로 재미있어서다. 나의 불안이 어느 모로 보나 부족한 나의 글쓰기 행위에 잠재워진다는 사실이. 차분하게 생각할 수 있다 이제. 뭐부터 해야 하는지.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먼저 이 글을 마친다. 그리고 다른 파일을 열어 다듬어야 할 글을 들여다본다. 형식적인 것이지만 꼭 마무리 지어야 하는 글이다. 쓰다가 막히면 다음 번에 연재할 단편의 초안을 궁리하면 된다. 중간에 주문이 들어올 테니 장사도 착실히 한다. 아버지에게 보행기를 보낼 일정을 궁리하고, 딸과도 중간중간 통화 할 것이다. 노트북은 계속 책상 위에 펼쳐져 있을 것이다. 손바닥 위에 놓인 나의 불안을 마주한 채 나는 글을 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