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사진: Brian Kersisnik "Grande Empathie">
그녀는 식기 세척기 안에 가로로 놓인 칼을 봤다. 군더더기 없이 투명하게 빛나는 날카로운 칼날이 그녀의 하얗고 단단한 손목을 깔끔하게 지나가는 광경을 상상했다. 칼이 지나간 자리가 벌어지면서 빨간 피가 흘러나온다. 예리한 통증이 심장을 관통하면서 온몸으로 퍼져 나간다. 소름이 끼치는 동시에 저릿한 통증이 뇌를 지배한다. 그녀는 눈을 감으며 일련의 과정을 머릿속으로 그려보았다. 통증만 아니라면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시도했을지도 몰라, 그녀는 속으로 생각한다. 피가 흘러 바닥에 떨어지는 건 극적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녀는 소리 소문 없이 공간 속으로 빨려 들어가길 바랐다. 칼에 베이고 몸 안의 피가 모두 빠져나가 창백해지면서 사라지는 것이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녀는 식기 세척기의 칼자루를 손에 쥐고 파를 썰기 시작했다.
꼬이고 꼬였던 실뭉치 중에 한 가닥이 풀렸다. 아침의 일이었다. 모든 것은 모신에서 시작됐다. 그녀가 그에게서 모신이라는 이야기를 들을 순간 그 단어는 그녀의 뇌를 지배했다. 하지만 어디에서 실마리를 찾아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근 한 달 동안 그녀는 안개 덮인 호수 위를 떠다니는 기분이었다. 그러다가 그녀는 알게 되었다. 결국 내가 틀린 건 없었어. 그녀는 생각했다. 절대적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한 집안의 가장이 바로 서야 모신이라는 게 작동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아내는 남편에게서 감정적 수용과 지지를 받아야 모신을 작동할 수 있다. 요즘 세대에 고루하다고 생각한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그것이 인간이라는 존재에 심어진 하드웨어다. 남편의 감정적 수용과 지지가 없이 아이를 잘 키우는 엄마도 있다라고 반박할지도 모른다. 그건 남편이라는 존재가 물리적으로 아예 없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염두해 두어야 한다. 혼자서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이 아이를 아주 훌륭하게 키우는 경우는 많다. 감정적 수용과 지지를 줄 수 있는 사람이 곁에 없기 때문에 그녀들은 혼자서 그 시스템을 작동시킨다. 하지만 배우자가 곁에 있을 때는 얘기가 달라진다. 배우자에게 받고 싶어진다. 배우자가 그 욕구를 채워주지 못하면 그녀 안의 하드웨어는 작동을 하지 못하거나 자가발전을 돌리더라도 가족으로 묶여 있는 남편의 영향으로 결국 시스템은 녹슬어 버린다. 녹슨 시스템은 사고회로 전체를 좀먹는다. 모신은 영영 작동하지 못한다. 그 영향을 가장 많이 받게 되는 건 결국 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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