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숨 쉬고 싶은 곳

by 선율

“그렇기에 여행할 장소에 대한 현명한 선택을 내리기 위해서는 세상 밖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안을 먼저 들여다보아야 한다. 우리 삶에 비어 있는 부분이 무엇인지, 자신의 가장 약한 부분은 어디인지를 말이다. 이런 질문들을 통해 이 지구의 어느 곳에 나를 도와줄 힘을 지닌 장소가 있는지 찾아내야 하는 것이다. 그곳은 자연일 수도 혹은 도시일 수도 있다. 아니면 열대 지방이거나 빙하가 가득한 장소일지도 모른다.”
— 알랭 드 보통, 『나를 채우는 여행의 기술』


여행이란 언제나 '어디로 갈 것인가'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된다. 그런데 이 단순한 물음에는 보이지 않는 전제가 하나 숨어 있다. '지금의 나는 어디가 비어 있는가'라는 물음이다. 여행지는 단순히 휴식처가 아닌, 나라는 사람을 마주하고 회복시켜 줄 공간이어야 한다는 것을 나도 이제야 조금씩 알게 되었다.


어느 해 여름, 나는 무작정 남쪽 섬으로 떠났다. 햇살과 바다가 위로해줄 거라는 막연한 기대가 있었다. 그런데 그 여행은 오히려 나를 더 피곤하게 만들었다.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아름다웠지만, 내 안의 혼란은 가라앉지 않았다. 그때 처음 깨달았다. 내가 찾은 건 단순한 '장소'가 아니라, 내 마음과 결이 맞는 '공간'이어야 했다는 것을.


그 이후 나는 여행을 계획할 때 나 자신에게 묻기 시작했다. 요즘 나는 무엇이 부족한가? 무엇이 아픈가? 어떤 감정을 돌보지 못했는가? 어떤 모습으로 다시 살아나고 싶은가? 그런 질문들이 모이고 쌓인 끝에야 비로소 진짜 목적지가 보였다. 어떤 때는 깊은 숲 속의 조용한 오두막이었고, 또 어떤 때는 사람들로 북적이는 대도시의 작은 카페였다. 중요한 건 장소가 아니라, 그 장소가 나에게 주는 울림이었다.


우리 삶에는 때때로 설명할 수 없는 결핍이 스며든다. 무기력, 외로움, 혹은 방향을 잃은 막막함 같은 것들. 이런 감정은 억지로 이겨내거나 무시한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그럴 땐 오히려 멈춰서 그 감정을 따라가보는 게 필요하다. 그것이 어떤 지형, 어떤 기후, 어떤 문화와 만났을 때 비로소 조금은 말랑해질 수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여행이란 그렇게 내면을 들여다본 끝에 도달하는 물리적 움직임이다.


우리가 어떤 장소에서 갑자기 마음이 평온해지는 순간이 있다. 공기의 결, 바람의 무게, 사람들의 눈빛, 거리의 소음마저도 나를 감싸는 듯한 감각. 그것은 그곳이 내 마음의 균열과 꼭 맞아떨어지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마치 오랜 시간 기다려온 사람이 '여기야'라고 손을 내미는 것처럼. 그런 여행지는 어떤 때는 아무도 찾지 않는 시골길이기도 하고, 어떤 때는 무명의 작은 미술관이기도 하다.


알랭 드 보통이 말했듯, 여행의 기술은 외부를 탐색하기에 앞서 내부를 성찰하는 데서 시작된다. 내가 누구인지, 지금의 나는 무엇이 필요한지를 먼저 알고 나서야, 세상 어딘가에 그 질문에 답해 줄 장소를 찾을 수 있다. 그리고 그 장소는 반드시 멀리 있지 않을 수도 있다. 아주 가까운 공원일 수도, 책상 앞의 조용한 오후일 수도 있다.


결국 여행은 나를 채우는 방식이다. 누군가는 모험을 통해, 누군가는 고요함을 통해, 또 누군가는 전혀 다른 풍경을 통해 자기 삶의 빈틈을 채운다. 그러니 떠나기 전, 가장 먼저 들여다봐야 할 지도는 마음이다. 거기에 길이 있고, 거기에 목적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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