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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거운 책임감을 내려놓는 방법

드넓은 해변을 상상해요

by 김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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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날이 있어요.

집에 웅크려선 한 발자국도 나가고 싶지 않은 날. 누구에게도 상처받고 싶지 않고, 싫은 소리 죽어도 듣기 싫은 날요. 그런 날이 있지만, 우리는 부지런히 밖을 나가요. 세상에게 또 상처받을 줄 알면서도 왜 굳이 밖을 나서냐 물으면, 당신은 그렇게 대답하겠죠. 밥 벌어먹고 살기 위해서, 어쩔 수가 없다고요.

현실적인 이유 때문이겠죠?

돈이라는 게 내 생활에 활력소가 된다지만요. 열심히 피땀 흘려 번 돈이 빠르게 빠져나가는 걸 보면 어쩐지 한숨이 나와요. 월급날은 그래서 기분이 좋으면서도 좋지 않은 날이기도 해요. 마치 빚을 갚기 위해 일을 하는 것만 같아서요.

이게 내 인생인지, 내 인생의 부수적인 것들을 위한 인생인지 모르겠죠.

그렇다고 일을 그만 둘 순 없어요. 나를 바라보는 많은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에요.

엄마를 위해서, 배우자를 위해서, 자식들을 위해서 사는 것만 같아요. 어쩐지 내 인생이지만 내가 없어요. 난 그저 일을 하는 기계인 것 같아요. 난 늘 항상 다른 사람을 위한 인생을 살아온 것만 같아요. 그게, 그게 가슴을 가장 아프게 파고들어요.

답답해요.

이런 걸 책임이라고 하나요?

책임은 왜 그렇게도 목을 옥죄어 올까요?

갑갑하고, 무거워서 집어던지고만 싶어요.




그 책임이라는 것이요.

만약 옷이라면 어떨까요?

전부다 홀랑 벗어버린다면요. 물밑이 환하게 비치는 바닷가로 뛰어들어, 넓고 길게 팔다리를 뻗고 싶어요. 바위틈 사이를 누비며, 작고 귀여운 물고기들을 따라가고 싶어요. 우람한 돌고래의 등 위에서 나른하게 선탠도 받고 싶고요. 뭐, 햇볕에 몸이 좀 타면 어때요. 괜찮아요. 계절이 한 바퀴 돌고 나면 그마저도 금세 괜찮아질 거예요. 해변을 나와서는 오렌지와 자몽을 갈아 만든 칵테일을 마시고 싶어요. 아! 파인애플도 있다면 좋겠어요.

노곤하다고 바로 잠이 들 순 없어요. 해변에서 보내는 하루가 아쉽잖아요. 길쭉한 잎사귀로 허리춤을 가린 채, 모닥불 앞에서 춤을 추고 싶어요. 대나무 잎으로 만든 피리로 작은 연주회도 만들고요. 서로 손뼉을 치며 노래하고 싶어요. 사랑하는 사람 어깨에 기대어, 석양이 지는 산등성이를 보며 잠이 들고 싶어요.


옷이라면요.

책임, 걱정, 생각들. 전부 벗어버릴 수 있는 옷이라면요.




그런 날이 있어요.

집에 웅크려선 한 발자국도 나가고 싶지 않은 날.


그런 날은요. 잠깐 눈을 감고 눈부신 해변을 상상해요.

자유롭게 바닷속을 누비는 모습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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