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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현진 Jul 29. 2021

다이빙 수업

때론 길에서 만난 식물들이 숙제 같다. 그림으로 옮기면 ‘딱’ 일 것 같은, 절정의 순간을 맞은 꽃이나, 상처 하나 없이 깨끗한 잎사귀, 혹은 서리를 맞아 아름답게 오그라든 열매 같은 것들이 특히 그렇다. 자료로 남길 사진을 정면과 측면에서 찍고, 잎 한 장, 열매 하나를 렌즈에 담으며 고민한다. “어떻게 그려야 할까?, 가로 구도가 세로보다 나을까?, 배치는 어쩌지?…” 머리를 쥐어짜다 보면, 마주친 순간에 느꼈던 즐거움은 어느새 휘발되어 버린다.

식물과 그림을 좋아해서 식물을 그려내는 직업을 선택했는데, 식물이 숙제로 바뀔 때마다 조금 의아하고 억울하다. 취미가 아닌 생업이니까, 일정한 퀄리티를 내고 있는지, 꾸준하게 노출될 수 있도록 작업 속도를 잘 조절하고 있는지, 상업적으로 가치가 있는지, 그리고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그림인지 등을 고민하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부담스럽게 느끼는 순간이 늘어난 것 같다.

이런 마음을 미리 알았던 건지,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던 친구가 생각난다. 역시 식물들을 전처럼 그저 즐기려면, 식물 바깥의 직업을 찾아야만 하는 걸까. 그렇지만 여전히, 식물을 마주하면 카메라 렌즈보다 감탄이 앞선다. 식물은 언제나 사랑스럽고 애틋하다. 다만 조금씩, 눈앞의 식물을 즐기는 연습이 필요한 게 아닌가 싶다. 다이빙하듯 풍덩 뛰어들어서.


* 월간 <환경과 조경(Landscape Architecture Korea)>에 2021년 3월호에 실린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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