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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친절한 James Jun 11. 2024

첫 번째 등불을 켜고

2024.6.11.


새카만 침묵의 공기가

겹겹이 쌓인 4월의 어느 밤.

짙어지던 암흑 저 멀리에서

성냥불 같은 반짝임이 타오르고

땅을 구르던 웅성임이 창문을 두드렸다.

한껏 말라있던 대지에

촉촉한 웃음을 안겨주는 소리, 봄비다.


선인장 가시처럼 예민해진 마음 때문에

잠들지 못하고 낡은 나무 침대 위에서

뒤척이던 S는 어둠 속에서 눈을 떴다.

가만히 누워 천장을 바라보니

차츰 주변이 어슴푸레 선명해졌다.

고개를 돌려 책상 너머 창가에 비치는

빗방울 그림자를 세다가

잠자리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빳빳한 홑이불을 눈송이처럼 뭉쳐

옆으로 치워두고 두 발을 빨래처럼 내밀어

침대에 걸터앉았다.

"비가 오네."

한숨 같은 한마디가 입에서 삐죽거렸다.

신호등 초록불을 닮은 섬광이

어두운 방을 때때로 비췄다.

닫힌 창문을 뚫고 벽을 두드리다

사라지는 낯선 빛의 흔적.

병원에서 X-ray를 찍을 때처럼

짧고 어색한 서늘함.

구름 위에서 밝힌 전등불이

땅 위에, 방 속에 있는

S를 훑어 내렸다.


실낱 같은 밝음과

나무토막 같은 어둠.

그리고 그 속에 우두커니 앉아있는 시간.

S는 침대에서 일어나 방문을 열었다.

창백한 번갯불을 닮은

차가운 금속 손잡이가

손에서 번쩍거렸다.

방 안에서 불을 켜고 싶지 않았다.

두 사람이 간신히 지날

좁은 복도를 느릿느릿 걸었다.

띄엄띄엄 간이 창문마다

어둠이 토해내는 불꽃이

피어올랐다 사그라졌다.

해진 라탄 슬리퍼를 끌며

S는 복도 끝 모퉁이에 다다랐다.

위층과 아래층으로 갈라진

나무계단이 무심하게 뻗어 있었다.

멈칫 양쪽을 살피던 S는

뻣뻣한 난간에 손을 올리고

걸음을 아래로 옮겼다.

물속으로 빠져드는 돌멩이처럼

S는 아래층으로 가라앉았다.


계단에서 두 번째 방으로 들어가는

판자문을 밀어젖히고

S는 불을 켰다.

방 한가운데 천장에 달린

백열전구가 눈을 뜨자

졸린 노을빛이

침침한 공간을 물들였다.

10명쯤 누울 수 있는 방 한쪽 벽에는

짙은 갈색 목재판과 문걸이 모양의

철제 기둥을 사이사이에 세운

책장이 펼쳐져 있었다.

3단 선반 제일 위쪽에는

크고 작은 상자들이 자리를 채웠고

가운데에는 세계 각지에서 모은

다양한 초와 등불이 모여있었다.

맨 밑에는 뽀얀 책들이 빼곡히 들어섰다.

S는 맨 앞쪽 첫 번째 등불을 켜고

백열전구를 끈 다음

눈을 지그시 감았다.

아른거리는 불빛이

아련한 추억처럼 눈앞에서 흔들렸다.

그래, 그날도 꼭 오늘처럼

비가 내리는 4월의 밤이었지.

S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눈을 떴다.


첫 번째 등불을 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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