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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친절한 James Jun 18. 2024

모직 숄에 대해 써라

2024.6.18.


O는 감각에 밝았다.

촉감이 특히 뛰어났다.

두어 번 문질러 본 직물에서

혼방비율을 정확히 알아내기도 하고,

손바닥으로 쓰다듬어 본

가죽의 종류와 제조 연도를

맞추기도 했다.

산책길에 집어 든 조약돌의

재질 정도는 눈 감고도 알 수 있었다.


O는 종이를 좋아했다.

'종이 만지기를 좋아했다'라는 말이

더 정확할 것 같기도 하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다양한 종이의 질감은 언제나 생생했다.

O는 시간 날 때마다

집에서 멀지 않은 도서관에 들렀다.

글자나 그림보다 종이가 좋았다.

한참 수많은 책을 뒤적이다 보면

몇 시간이 훌쩍 흘러갔다.

바다를 가로지르며

세력을 키워가는 '태풍'처럼,

O의 촉각은 '폭풍 성장'했다.

이제는 단순히

종이의 두께나 강도, 탄성뿐만 아니라

종이의 묶음인 책을 스쳐간 사람들의

특성과 성격도 희미하게 드러나는 듯했다.

책의 이력이라고 할까, 그 속에 담긴

감정을 읽어낼 수 있게 되었다.

마치 홀로그램처럼 손끝 촉감이

머릿속에 활짝 떠오르며

영화처럼 나타났다.

오래된 책일수록 그 느낌이 더 선명했다.


한창 종이에 빠져있던 O가

옷감에 빠져든 건 그날 저녁이었다.

남다른 감각 때문에 정규 교육과정은

다니지 못하고 특수학교와 대안학교를

전전했다. 하지만 오래가지는 못했고

철새처럼 집의 세계로 돌아왔다.

그날도 채 세 달을 채우지 못하고

끝나버린 교육 과정의 파편을 털어내고

O는 부모에게 돌아왔다.

답답한 공기 속에서 쫓기듯 먹은 저녁 때문에

속이 불편한 O는 다락방에 올라갔다.

어릴 때부터 이곳은 O에게 편안함을 주었다.

손때 묻은 잡동사니와 먼지 덮인 상자로부터

O의 감각이 자라났다. 그날도 O는

다락방을 기웃거리다가 쪽창 아래

나무 선반 밑에서 낯선 보따리를 보았다.

지금껏 계속 눈길이 갔던 곳인데

누군가 방금 가져다 놓은 듯 새로웠다.

반투명 연보라색이 인상적인 낡은 보따리.

O는 천천히 보따리를 풀어보았다.

해진 옷 몇 개와 빛바랜 슬리퍼,

그리고 예스러운 모직 숄이 있었다.

아, 첫인상은, 글쎄,..

말더듬이 같던 모직 숄,

손끝에서 무언가 뚝뚝 끊기는 감각이

편치 않았다. 이런 경우는 처음인데..

회색과 흰색, 빨간색 체크무늬가

깨진 유리조각처럼 날아드는 기분.

O는 숄을 보따리에 쑤셔 던지고

도망치듯 다락방을 내려왔다.


모직 숄에 대해 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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