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렌지 껍질 까기
2024.9.30.
by
친절한 James
Sep 30. 2024
눈에 보이는 너.
노르스름한 주황색
주먹 모양의 한 덩어리.
부드러운 탄탄함과
적당한 묵직감이
손에 착 감기는 느낌.
오 솔레미오 그대는 아름답구나,
오, 오렌지여.
그대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그대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태곳적 시작도 끝도 알 수 없는
깊고 넓은 샘물이 샘솟듯 침이 고인다.
입맛이 돋네,
먹고 싶고 갖고 싶다.
너와 나는 하나가 되어야 한다.
백억년 단위의 무한한 공간 어느 한가운데
영원의 굴곡 사이에서
우연과 우연이 거듭된 필연으로 만난 우리.
태양의 아들과 딸로 자라나
꽃 피우고 열매 맺어 얼굴을 마주하네.
언젠간 스러져 왔던 곳으로
돌아가야 할 운명,
그 언젠가 흩어져 모였던 그곳으로
흘러가야 할 숙명이 기다리고 있지.
무뚝뚝한 외피를 벗는다.
손가락이 너의 꼭지를 파고든다.
시큼한 틈새가 뻐끔거린다.
터지듯 찢어지는 과육의 외투.
사방으로 터져 나오는 향긋한 눈물방울은
이별의 슬픔인가 만남의 기쁨인가.
귤이나 레몬도 너와 비슷하지만
조금 다르지.
한라봉이나 천혜향, 레드향도 그렇지.
주스가 되고 싶니?
몸을 갈아 액화된 애틋함.
가슴 깊이 알알이 맺힌 알갱이는
이제 머나먼 추억 속에서만
살아 숨 쉬는 신화가 되었다.
섬유질 질긴 인연은
단장의 애달픔으로 끊어져 버렸다.
둥글게 꾸던 꿈은
잔 따라 컵 따라 입술에 채워져 갔다.
이 순간의 나는
이미 내가 아니고 너다.
이 찰나의 나는
이미 네가 아니고 우리다.
외로운 기쁨도 이젠 안녕.
들푸른 생명의 밭에서
일렁이는 태양볕을 다시 머금을 때가
언제일까. 이 우주가 다하기 전에
다시 돌아올 거야.
그리고 다시 만날 거야.
이토록 향기로운 꿈 속에서.
오렌지 껍질 까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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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일 작가연습 프로젝트 10
23
거절에 대해 써라
24
물이 피부에 닿는 느낌
25
오렌지 껍질 까기
26
서서히 완성되는 밤-데이비드 세인트 존
27
잊혀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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