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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친절한 James Nov 21. 2024

그것은 손으로 만들었다

2024.11.21.


첫인상은 참 강렬했다.

K는 아직도 그날을 잊을 수 없었다.

사막 한가운데에서 몇 날 며칠을 헤매다

오아시스를 마주한 기분이 이런 걸까.

메말라가던 생명 줄기가

부르틈을 멈추고

물기에 촉촉해지는

감촉 같던 순간,

K의 가슴속에 빛이

한 송이 피어나는 순간이었다.

살아있는 마법도구,

그걸 뭐라고 불러야 할까.


K의 할아버지는 괴짜였다.

공부도 곧잘 했고 꿈도 많던,

이른바 촉망받던 젊은이였다.

명문대에 합격하고 입학을 앞둔 즈음

그는 어느 자선 공연에서 들었던

첼로 선율에 마음을 빼앗겼다.

음악도, 악기도 잘 몰랐고

관심도 없었던 20여 년의 인생이

송두리째 흔들리던 날이었다.

그는 첼로를 직접 만들고 싶었다.

연주자가 될까 잠깐 고민했다가

자기가 좋은 악기를 만들어

실력 있는 첼리스트가 연주하면

더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는 악기 제작을 배울 수 있는 곳을 알아봤다.

당시 국내에는 그런 곳이 없었다.

해외로 가야 했다.

가난한 소작농으로 공부 잘하는 외동아들을

키워낸 부모에게는,

아들이 판검사나 의사가 되기를 바랐던

그들에게는 억장이 무너지는 일이었다.

고성과 눈물이 가득한 밤들이 지나고

부부가 거친 손으로 한 푼 두 푼

모은 등록금은 아들이 자신의

생일에 떠나는 독일행 비행기

티켓이 되었다.

쉬운 길은 분명 아니었다.

고등학교 제2외국어 수준과 푼돈,

그리고 열정만 갖고 무언가에 홀린 듯

떠난 길이었다. 이유는 잘 몰랐지만

그는 그래야 할 것 같았다.


다시 50년 전의 겨울로 돌아가도

같은 선택을 했을 거라던

그의 씁쓸한 웃음을

K는 기억해 냈다.

그는 K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종종 들려줬다.

자녀들과 사이는 별로였지만

막내 손녀를 유달리 예뻐했던 그였다.

도심과 꽤 떨어진 산중턱에

작업장이 딸린 집을 짓고

일에 몰두하다가도

K가 놀러 오면 손길을 멈추고서

하나라도 더 말해주고 보여주려고 했다.

맛있는 음식도 만들고

편안한 방도 마련해 주었다.

K도 그를 잘 따랐고

그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좋았다.

아마도 모든 혈연을 통틀어

가장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을까.

그러고보니 그의 손재주를

가장 많이 닮은 사람도

K인 듯했다.


그의 작업장엔 신기한 것이 많았다.

첼로도 여럿 있었지만

K는 다른 것들에 더 관심이 갔다.

할아버지가 직접 만든,

K가 마법도구라고 부르던

조각과 장난감들이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는 그것들을 K가

마음껏 가지고 놀게 했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첫눈이 열 번쯤 내렸다.

이제는 K도 예전만큼

그를 보러 가지 못했다.

부친을 달가워하지 않던 둘째 아들은

학업을 앞세워 K의 동선을 제한했다.

특히 할아버지 집 방문을 꺼려했다.

무언가에 빠져 가정을 소홀히 한

아버지를 좋아할 자녀는

별로 없을 것이다.

눈이 많이 내리던 12월 중순,

꼭 필요하다던 도구를 외국에서 구해

옷가지 등과 함께 그에게 전해주고

집으로 돌아오던 엄마와 큰형을

사고로 잃은 사람에게는

더 그럴 것이다.


세월은 흘러

K는 돌아가신 큰아버지 나이가 되었다.

야근에 녹초가 된 몸을 이끌고

집으로 향하던 K는

버스 정류장에서 손을 잡고 있는

할아버지와 손녀를 만났다.

불현듯 K는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주인 없이 냉기를 품고 산속에서

웅크리고 있을 그곳, 거기에서

빛이 바래고 있을 수많은 악기,

그리고 신기한 작품들.

그중에서도 K의 뇌리를 떠나지 않는 그것,

금빛으로 반짝이는 손바닥 크기의 조각,

날개를 움직이다가 팔랑 위로 떠오르던

신기한 나비, 진짜보다 더 진짜 같았던

마법 도구, 무엇으로 어떻게 만들었는지

끝까지 가르쳐주지 않았던 비밀,

그냥 손으로 만들었다고만 했던

그것이 보고 싶었다.

지금도 있을까.

할아버지,

그리움이

무너져 내렸다.


그것은 손으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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