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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친절한 James Feb 03. 2024

누군가 시를 읽고 있다

2024.2.3.


아, 또 시작이다. 

봄바람에 흩날리는 벚꽃길 풍경처럼

밀집한 두상들의 무리가 객차를 채워갔다.

파도에 떠밀리듯 묵직한 압력이 

옷을 타고 몸속으로 파고들었다.

항상 이 환승역에서부터 

사람들이 몰려든단 말이지. 

오늘은 집에서 늦게 나와 

탑승역에서부터 서서 왔는데 

내릴 때까지 자리에 앉는 건 힘들 것 같다.


출근길 지하철 풍경, 같은 공간 속

매일 다른 듯 비슷한 사람들,

무심한 표정이 가득한 만차의 속살. 

좌우를 살펴볼까. 

사실 시선을 돌리기도 쉽지 않았다. 

그래도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가고 있나 궁금하긴 했다.

이용자들은 저마다 자신만의 네모 상자에 

푹 빠져 있었다. 

대부분 무선 이어폰을 귀에 꽂고 

눈은 화면을 보는 중이었다.

왼쪽에 비스듬히 서 있는 젊은 남자는 

게임 중이었다. 엄청 몰두하고 있네.

캐릭터가 돌아다니며 괴물들을 

무찌르고 있었는데

화려한 그래픽과 섬광에 눈이 부셨다. 

와, 저런 걸 계속 봐도 눈이 안 아픈가. 

P는 가는눈으로 쳐다보다 고개를 돌렸다.

주변은 빽빽한 인파로 가득했다. 

답답한 공기는 가슴을 옥죄는 것 같아.

이 많은 사람들은 다들 어디로 가는 걸까. 

이렇게 같은 시간에 모이고 흩어지는

일상이 과연 당연한 걸까. 


흔들리는 급행열차는 덜커덩거리며 

잠에서 덜 깬 육교를 가로질렀다. 

저 아래 출근 차량들이 도로를 꽉 메웠다. 

행인들의 걸음도 분주했다. 

지하철 차량은 무거운 걸음을 멈췄다.

탈출구가 입을 벌리고 두 번째 환승역인

이곳에서 승객 절반 이상이 내렸다.

이제야 좀 살 것 같네. 아직 좌석은 

꼭 찼지만 시야가 트였다. 

아, 그런데 맞은편 출입문 구석에 

책을 읽는 사람이 있었다. 

꽤 두꺼워 보이는데 뭘까 궁금해졌다. 

어차피 다음 역에서 반대편 

문쪽으로 내려야 해서 자리를 옮겼다. 

슬쩍 본 제목은 <괴테 시 전집>.

괴테가 소설뿐 아니라 시도 썼구나. 

진지한 표정으로 책장에 눈길이 머문

모습이 뭐랄까, 비범해 보인다고 할까. 

P도 <파우스트>를 읽어봤는데

아직 시는 접해보지 못했다. 

희끗한 머리에 금빛 테두리 안경을 쓰고

책을 읽는 자세가 참 꼿꼿했다. 

P는 누군가 시를 읽는 이날을 

인상적인 출근길로 기억했다.


여느 때처럼 정신없는 오전을 지나고

맞이한 점심시간, 문득 며칠 전 풍경이 

P의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P는 회사 근처 큰 서점에 들렀다. 

오늘은 괴테의 책을 살펴볼까.

먼저 베스트셀러 매대를 둘러보고

뒤쪽 서가로 걸음을 옮겼다. 

그곳에 놓인 책 한 권에서 처음 보는

글귀 하나가 피어났다. 

"우리의 운명은
겨울철 과일나무와 같아요.
그 나뭇가지에 다시 푸른 잎이 나고
꽃이 필 것 같지 않아도 
우리는 그것을 바라고,
그렇게 되리라고 알고 있지요.

딱 지금 P의 마음을 대신 읽어주는 듯,

3년 차 직장인으로 앞으로의 진로에 대해 

걱정이 많았는데, 답은 아직 몰라도

뭔가 위안을 주는 말, 가슴에 담아두자.

검색을 하다 보니 새로운 곳을 발견했다.

경기도 여주에 있다는 여백서원,

나중에 한번 찾아가 봐야겠다. 여기에서 

그때 그분처럼 괴테의 시를

한 구절 읽어보면 좋을 것 같다.

시를 잊은 그대에게 그동안 쌓여 온

삶의 주름을 어루만져줄 

시어 하나 마음에 심어보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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