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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어라 Feb 16. 2023

얼굴도 예쁘고 목소리도 고우면 인어공주하지!

   지금껏 살면서 내 입으로 말해본 적은 없지만 사실은 남들에게 내세울만한 자랑거리가 하나 있다. 나는, 목소리가, 좋다.


  그냥저냥 좋은 편이 아니라 꽤 좋다. 글에서야 목소리가 전달되지 않으니 되는대로 하는 말일지도 모른다, 고 생각하신다면 그야말로 오산. 지금까지 살면서 어떤 자리건 첫 만남에서 항상 목소리 칭찬을 들었다. "목소리가 좋으시네요.", "목소리가 참 듣기 좋아요."는 흔하고 예전에는 간혹 "혹시 성우세요?"하는 말도 들었다. 아주 가끔 "통신판매하시면 대박나시겠어요."라는 농담도 들었다.


  이쯤에서 눈치를 채야한다. 그렇다. 애석하게도 미인이세요, 라는 말은 평생 들어보지 못했다. 어쩌겠는가, 타고난 얼굴이 그러하고 과학의 힘을 빌릴 재력과 용기가 없는 것을. 목소리가 좋은데 얼굴까지 예쁘면 인어공주를 하고 있어야지, 여기서 일하는 아줌마로 살 턱이 있나.


  어찌되었든 미모는 갖지 못했지만 첫 만남에서 상대에게 호감을 주고 좋은 인상을 남길 수 있는 장점이 하나라도 있다는 것은 감사한 일이다. 나중에는 자기소개 자리에서 신은 공평하게 얼굴을 앗아가고 목소리를 주셨다고 내가 먼저 말하곤 했다. 나름 유머였는데, 요새는 안한다. 그것도 어느 정도 예쁜 사람이 해야, 어머 아니에요, 맞장구 치면 분위기가 풀어지지. 팩트는 재미도 없고 말한 사람만 처량해진다.


**********

  목소리에 생각이 미치고 보니 이것저것 떠오르는 이야기들이 있다. 아마 초등학교 4학년 때 일거다. 당시 담임선생님 추천으로 몇 달간 교내 방송 진행을 맡았다. 지금 생각하면 그야말로 혁신적인 발탁이었다. 공부를 잘 하는 것도 아니고 반장같은 임원도 아니며 심지어 엄마가 학교에 와 본 적도 없는 아이에게 이런 기회가 주어지다니, 담당 선생님의 의지가 아니었으면 어려운 일이었을 것 같다. 덕분에 매주 월요일 아침, 위인들에 관한 영상을 보기 전에 내 목소리가 전교에 흘러나갔다. 마이크 앞에서 떨면서 원고를 읽던 기억, 방송실 풍경까지 지금도 떠오른다.


  학년이 올라가면서 수업시간에 책을 읽을때마다 선생님들은 "이 다음에 아나운서하면 참 좋겠다"고 얘기해주셨다. 덕분에 아나운서가 뭔지도 모르면서 어린 마음에 잠시 꿈을 꿔보기도 했다. 중학교시절에는 밤마다 라디오를 틀어놓고 들으면서 라디오 디제이를 상상했다. 그래도 내가 목소리가 좋다는 자각은 없었다. 단지 남들이 그렇게 말하니까 그런가보다 할 뿐이었다.   


  고등학교 입학하니 점심시간에 간단한 멘트와 함께 노래가 흘러나왔다. 방송반이라고 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방송반 신입부원 모집에 지원했다. 우리 반에서 나 포함 두명이 지원했는데, 한 명만 붙었다.

면접일, 근엄한 표정을 하고 있는 선배들이 나란히 앉아있었다. 그 앞에 아나운서를 지망한 신입생들 대여섯 명이 주욱 서있었다. 긴장한 지원자들에게 드디어 첫 번째 질문이 던져졌다.

- 어떤 음악을 좋아하나요? 자기가 좋아하는 음악에 대해서 말해보세요.

  내 옆에 서 있던 같은 반 친구는 소심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가리는거 없이 아무 노래나 잘 듣는다고 대답했고, 이어 내 차례가 되었다. 평소에 음악을 많이 들었기에 짧은 지식을 최대한 동원해서 정성스럽고 자신있게 대답했다. 어떤 장르의 음악을 잘 듣고 어떤 장르의 음악은 선호하지 않는다고.


  떨리는 마음으로 면접을 끝내고 발표공고를 기다렸는데, 붙은 사람은 같은 지원했던 같은 반 아이였다. 나는 보기좋게 탈락했다. 내가 더 목소리가 좋고 발음도 정확했다고 생각했는데. 도대체 내가 왜 떨어진걸까? 음악을 가려듣는다는 답변이 선배들 마음에 안들었나보다고 생각하고 이후로 일체 방송이나 진행에 관한 마음을 접었다.


  대학교 신입생 소개때 내 목소리의 단점을 알았다. 주변에서 장점은 쉽게 말해주지만 단점은 잘 말해주지 않으니까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내 단점은 긴장하면 한 톤 더 높아지고 말도 엄청나게 빨라진다는 점이었다. 강당 무대 위에서 학과선배들에게 자기 소개를 하고 난 후사람들이 해주는 이야기를 듣고 알았다. 좋은 울림이 있지만 침착하지 않으면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 후로 긴장되는 자리에서는 의식적으로 말을 천천히 하려고 노력한다. 목소리가 높아졌는지, 가늘어졌는지, 톤이 높아져 있지 않은지 살피게 되었다.


  칭찬을 많이 받았지만 타고난 목소리에 감사하게 된 것은 성인이 된 후, 정확히는 교사가 되고난 후였다. 교사가 된 후에도 정말 많은 수업을 들었다. 수많은 교사들, 강사들의 수업과 연수를 들으면서 목소리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똑같은 수업을 들어도 진행하는 사람의 목소리와 말투에 따라 학생들의 피로도와 집중이 달라지는 것을 경험했다. 어느 해인가 공개 수업을 참관하던 교장선생님으로부터 '교사의 목소리가 수업에 참 중요하다는 것을 선생님 수업으로 깨달았다'라는 평을 들었다. 교실에서 하루종일 내 목소리를 들려줘야하는 교사에게 좋은 목소리는 큰 강점이다. 단순히 아름다운 목소리가 아니라 상대방이 편안하게 느낄 수 있는 목소리. 비로소 감사의 마음을 가질 수 있었다.

  

  전화로 상담할 때도 학부모들에게 쉽게 신뢰와 친밀감을 전해준다. 몇 년 전 학교에서 심각한 갈등상황이 생겨서 내심 긴장하며 학부모님께 전화드린 적이 있었다. 놀라실 부모님께 차분히 설명드리고 이야기를 나눴는데, 의외로 학부모님이 담담하게 이야기를 하셨다. 그러더니 마지막에 "선생님 목소리가 너무 좋으셔서 긴장도 덜되고 걱정도 덜 되네요."라고 인사를 주셨다. 지금까지 목소리에 관해 들었던 칭찬 중에 가장 기쁜 칭찬이었다.


  그런데 요새는 목소리 좋다는 얘기도 덜 듣는다. 성대근육도 노화해서인지 많이 굵어지고 낮아졌다. 말을 많이 해서 노화가 빨리 온 걸까? 대놓고 내세우거나 자만한 적은 없었지만 그래도 자랑거리였는데. 이제는 더이상 칭찬을 못받으려나 싶어 살짝 아쉽다.


  뜬금없는 목소리 자랑이 길게도 늘어졌다. 노인이 되면 어디서나 경쟁하듯 서로 자랑거리를 늘어놓는다고 하던데, 나도 그런건지도 모르겠다. 앞으로 얼마나 더 들을지 모르니 한 번 더 말해보자. 지금껏 살면서 내 입으로 말해본 적은 없지만 사실은 남들에게 내세울만한 자랑거리가 하나 있다. 나는 목소리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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