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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어라 Jun 09. 2023

칼을 갈았다

  칼을 갈았다. 어떤 일을 하기 위해 작정하고 준비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진짜 말그대로 칼을 갈았다.


  옆동네 아파트 장터에 칼가는 할아버지가 오셨다. 식칼도 갈고, 과도도 갈고, 구두도 수선하고 가방끈도 달아주신다. 트럭에 도구를 싣고 와서 작은 플라스틱 의자 하나 내어놓고 손님을 기다리신다.


  퇴근길, 칼 갈아드린다고 쓰여진 깃발을 보고 부리나케 집에 들어가 칼을 챙겼다. 양파를 채썰려고 해도 몽둥이 같이 썰게 만드는 둔탁해진 부엌칼, 김밥을 썰때도 찌그러지고 뭉개트리는 우리집 부엌칼. 장인은 도구 탓을 안한다지만, 나는 장인이 아니니 매일같이 도구탓을 하게 만든, 안 썰리는 부엌칼. 칼꽂이에서 세 개나 꺼내 수건으로 둘둘 싸서 에코백에 담고 얼른 나왔다.


  도착해보니 이런, 이미 불을 끄고 트럭을 정리하고 계셨다. 난감한 표정으로 트럭 앞을 서성이자, 나를 눈치챈 할아버지께서 말을 거신다. "사모님, 칼 가시려고", "어째요, 제가 너무 늦게왔지요? 정리하시는데 어떡하죠?"했더니, '끙차', 트럭에서 내려오시며 "갈아드려야죠."하신다. 세 개나 챙겨왔길래 망정이지 하나만 들고왔으면 죄송해서 어쩔 뻔했나.

  할아버지는 말 없이 다시 전선을 연결하고 차곡차곡 넣었던 물품들이며 기계를 꺼내신다. 뒷문을 열어 바람이 통하게 하고는 자리에 앉으셨다. 밤이 어둑어둑 내리기 시작했다. 독일칼은 얼마, 중국산은 얼마, 국내산은 얼마라고 얘기하시는데, 내가 생각한 가격과 다르다. 내가 가져온 칼에 독일산 같은 이름이 붙어있지만 짝퉁인데, 독일산 가격으로 셈하신다. 가게를 다시 여신게 감사해서 그냥 그렇게 치렀다.   


  준비를 다 마치고 비로소 자리에 앉아 익숙한 손길로 정성스레 칼을 갈기 시작하신다. 오랜 세월 반복해서 해온 동작들. 몸에 배이고 손가락에 굳은 살로 남은 할아버지의 세월이야 나는 모르겠지만, 자신있게 갈아주시는 마음은 알 것 같다. 믿을 건 실력밖에 없다는 듯, 말 없이 칼을 가시는데 다행히 내 뒤로 손님이 계속 온다. 두 분은 칼을 갈러 오셨고, 또 한 분은 가방 수선을 맡기러 와서는 줄을 섰다.


  종종 내가 손님을 몰고다닌다는 생각을 한다. 아무도 없는 가게에 내가 들어가면 곧이어 손님들이 들어선다. 이런 일이 자주 있어서 스스로 좋은 손님이라고 생각하며 기분 좋아한다. 이 날도 그랬다. 나 하나 갈아주고 다시 문을 닫으면 죄송하고 서운할텐데, 내 뒤로 계속 손님이 와서 정말 뿌듯했다. 다시 가게를 연 할아버지의 수고만큼 더 장사하신 것 같아서 말이다.


  돌아가는 벨트에 칼을 앞뒤로 섬세하게 칼을 가시더니, 마지막으로 칼로 종이를 베어보며 확인하시곤 자신있게 내여주신다. 코팅 부분이 좀 벗겨지긴 했지만 투박한 할아버지 손길을 생각하면 너무 많은 바램이겠거니 싶었다. 조심스레 칼을 받아 값을 치르고 돌아왔다. 뒤돌아보니 전등을 밝히고 열심히 칼을 가시는 할아버지 모습이 진중해보였다. 분명 이 칼은 이전보다 훨씬 잘 들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정말, 잘 들어서, 무신경한 나는 그 날 저녁 날카로운 날에 손가락을 베이고 말았다. 아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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