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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10시 주점에서 혼술하는 아줌마, 나야 나

혼술, 어렵지 않아요

by 피어라

한 도서관에서 미술과 관련한 인문학 강연이 열렸다. 화요일 저녁 7시에서 10시까지 무려 3시간 강의다. 평일 퇴근 후 3시간 강의라니. 노쇠한 내 허리가 버틸 수 있으려나, 예전에 도둑맞은 내 집중력이 버틸 수 있으려나, 이래저래 걱정은 되었지만 듣고 싶은 주제라 큰 맘 먹고 신청했다.


기다리던 첫 시간, 열정적인 강사님과 열의 가득한 중년 학생들의 티키타카와 함께 강의는 쉼없이 이어졌다. 흡입력있는 강사의 진행과 진득하고 깊이있는 내용이 어우러진 좋은 강의였지만, 9시 반이 넘어가자 나는 버스어플로 언제 강의실을 뛰쳐나가야하는지 가늠하고 있었다. 그것도 맨 앞자리에 앉아서. 내 엉덩이가 들썩이는 것을 눈치채셨는지 다행히 강사님은 9시 41분에 강의를 마치시며 앞으로도 이 정도 시간에 끝을 내겠다 말씀하셨다. 역시 최고의 명강의는 일찍 끝내주는 강의고 최고의 명강사는 일찍 끝내주는 강사라는 진리를 다시금 확인했다. 감사합니다!


강사님이 끝났다고 선언하시자마자 나는 가방을 손에 쥐고 뛰쳐나와 버스정류장으로 달렸다. 다행히 놓치지 않고 버스를 탈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집까지 가려면 버스를 한 번 더 갈아타야한다. 후덥지근한 여름 밤, 아무도 없는 버스정류장에서 혼자 다음에 올 버스를 기다렸다. 아직 15분이나 더 기다려야했다.


덥고, 약간 출출하고, 피곤했다.


그저 편의점에서 박카스라도 살까 싶은 생각에 일어서서 버스정류장 주변을 둘러보았다. 빈 공터와 새로 지은 건물, 아직 가게가 들어오지 않아 어두운 공간들을 따라 조금 걸었다. 찾던 편의점은 보이지 않고 작고 아담한, 따스한 불빛이 보였다. 무슨 가게일까 싶어 가까이 다가갔다. 통창 너머로 작은 바와 나무테이블, 사장일듯한 사람이 보였다. 조금 더 고개를 빼고 들여다보니 간판에 정말 '술집' 이라고 적혀있었다. 심플한 이름도 마음에 들었다. 술집이라니.



- 어쩌지, 어쩌지, 언제 이런 주점이 생겼지, 이자카야처럼 보이는데 무슨 술이 있을까? 안주는 뭘까, 들어가고싶다, 아무도 없는 거 같은데, 지금 장사하는거겠지? 분위기 완전 내 스타일이다, 들어갈까? 말까?


치열한 내적갈등에 비해 고민의 시간은 짧았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이제 돌이킬 수없다. 술집에 들어왔으니 술을 마셔야한다.


"어서오세요"

"안녕하세요, 어...지금 먹어도 되나요?"

- 어딘가 멍청해보이는 목소리였지만 사장님은 친절하게 웃으며 답해주셨다.

"그럼요, 앉으세요."

"이런데가 있는 줄 몰랐어요, 밖에서 보다가 너무 마음에 들어서 저도 모르게 들어왔어요."

- 거짓말이다. 들어오고 싶어서 동동거리다 자기 의지로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 연지 얼마 안됐어요. 지금 가오픈기간이라 아직 사케도 별로 없고 그래요."

"그러셨구나, 처음 봤어요. 너무 가게가 마음에 들어서 한 잔 마시고 가려고 무작정 들어왔어요."

"안주는 육회랑 육전 빼고는 다 되요."


메뉴판의 형광분홍 글씨를 보다보니 심박수가 올라가는게 느껴졌다. 침을 꿀꺽 삼킨 후 주문을 했다.

10시가 넘은 야심한 밤, 혼자 찾아온 중년여인이 설레는 목소리로 사장님께 외쳤다.

"생맥주랑 야채똥집볶음이요!"


차가운 잔에 거품이 적당하게 깔린 생맥주가 나왔다. 꿀꺽꿀꺽꿀꺽꿀꺽, 정확히 네 번 식도가 꿈틀거렸다. 잔을 내려놓자 한숨인듯 감탄인듯 절로 소리가 나왔다. 머리 끝까지 차 올랐던 더위와 피로가 쏟아지는 것 같은 소리였다.

카하 -

첫 모금을 마시고 나자 그제야 긴장이 풀리고 숨이 쉬어졌다. 천장에 달린 보틀과 한 쪽 벽면을 장식한 거울도 눈에 들어왔다. 곧이어 후추향과 함께 양파와 채소를 볶을 때 나는 달큰한 향이 풍겨왔다. '치이이익'하고 기름이 튀겨지는 소리도 들렸다. 누군가가 나를 위해 음식을 준비하는 행복한 기다림의 시간. 나초따위로 내 입맛을 버릴 수는 없었다. 기본안주는 치워두고 읽던 책을 꺼냈다. 한 장 한 장 그림을 보며 책장을 넘기는 사이, 내 사랑 닭똥집이 나왔다.


길쭉하게 썰린 당근과 양파, 악센트가 되어주는 뾰족한 고추와 마늘, 그리고 오늘의 주인공, 쫄깃탱글한 똥집. 그 맛을 더욱 살려주는 고소하고 짭짤한 참기름장까지, 완벽한 한 상이 나왔다. 청홍백이 가득한 한 접시에 곁들인 차가운 생맥주! 하루의 마무리로 이보다 더 좋은 게 있을까!



똥집 한 점에 맥주 한 모금 마시고 책 한 문단 읽고, 야채볶은 한 젓가락에 또 한 모금 맥주 마시고 책장을 넘기고. 아들도 남편도 저녁밥도 설거지도 없는 나만의 시간. 완전한 힐링의 시간이었다. 오늘 강의시간에 맞춰가느라 저녁은 대충 간식과 커피로 때웠던터라 더 맛나게 먹을 수 있었다. 하나하나 먹다보니 어느새 잔이 비워졌다. 안주가 이토록 풍성한데 어찌 한 잔만 마실까. 한 잔 더 추가. 마시던 잔에 따라주셔도 되는데, 친절한 사장님이 차갑게 드시라며 냉장고에서 방금 꺼낸 차가운 잔에 맥주를 가져다주셨다. 입술에 닿는 잔이 차가워서 살짝 소름이 돋았다.


어두운 술집, 높다란 의자, 조심스런 조명과 작게 흐르는 음악, 차가운 술과 안주까지 모든 것이 다 현실같지 않았다. 영화처럼 길을 걷다 낯선 이세계에 들어가면 이런 느낌일까. 어딘가 다른 공간에 들어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묘하게 비현실적이었지만 차가운 술과 씹히는 안주의 촉감만은 생생했다.


조용히 책을 읽으며 혼술하는 선물같은 시간. 살면서 이런 혼술의 시간을 몇 번이나 가질 수 있을까? 나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리며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아, 행복하다. 혼자 술 한 잔 할 수 있는 이 시간이, 정말 행복하다. 속으로 행복하다는 말을 몇 번이고 되뇌이며 깔끔하게 맥주 두 잔과 안주 한 접시를 다 비웠다. 아무래도 당분간 화요일 밤마다 이 곳을 찾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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