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푸르른 청춘의 날에 나는 자취방 문을 잠그고 제니스 조플린을 들으며 울었다. 사랑도 연애도 무엇으로도 만족하지 못하고 어디로 가야할 지도 모른채로 방황만했다. 푸르지도 붉지도 않은 시간들이었다. 지금 같으면 병원을 찾아 도움을 받기라도 했을 텐데, 나는 그저 왜 마음이 힘든지, 왜 사람이 버거운지, 왜 사는게 괴로운지도 모르고 혼자 울면서 삭이고 버텼다.
30대,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는 모든 것들이 원망스러운 때였다. 연인들과의 이별을 지나 인연이라고 부를 사람과 결혼을 했고 아이를 낞았다. 뭣도 모르고 시작한 결혼과 육아는 어쩌지도 못하는 타인이라는 존재를 확인하게 해주었다. 자식도 남편도 무거겁기만했다. 낯섦음이 무언지 깨닫게 해준 타인들 때문에 내 안의 에너지를 쥐어짜내서 살았다. 눈에 보이는 휘황찬란한 세상과 내가 가질 수 있는 손바닥만큼의 세상을 비교하며 두 팔을 휘젓는데 그나마 남은 에너지를 소모하곤했다.
40대가 되었다. 지금껏 살아온 시간 정도가 내 앞에 남은 나이가 되었다. 아직은 손을 거둘 수 없다. 여전히 비루하고 초라하지만 무너지지 않기 위해 대책을 찾아야했다. 헤진 부분은 얼기설기 바느질을 해서 붙여놓고 뾰족하고 날카롭게 튀어나온 부분은 절로 깍여나갔다. 그렇게 겉은 그럭저럭 봐줄만한 모양새가 되었지만 안은 형편없었다. 이제는 안을 채우기 위한 노력이 필요했다.
어느덧 50대를 맞았다.
너그러워지고 유연해지고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게 되고 온전히 나를 채우기 위해 집중할 수도 있게 되었다. 아마도 지금이 가장 행복한 시간이겠지. 덜 고민하고 덜 고통스러워하고 덜 아파하며 지낸다. 많이 웃고, 많이 나누고, 많이 채우며 지낸다. 어차피 기대하는게 없으니까. 내일을 인지하지 못하는 뇌를 지닌 고양이처럼 그냥 오늘 하루만 생각하고 산다.작디 작은 행복들을 체험하고 오늘의 먹거리로 만족하며 밤이 오면 눈을 감고 눈을 뜨면 아침인 매일을 보낸다. 하루살이같은 삶이다.
어제 몇 년 만에 술자리가 있었다. 40대, 30대, 20대 여자들이 함께 있는 드문 자리였다. 즐겁고 내내 유쾌한 대화와 함께 저녁을 먹고, 술을 마셨다. 남편이나 친정식구들 아닌 사람과 마시는 술자리는 거의 5년 만이다. 잘 마무리하고 적당한 시간에 집에 들어왔다. 피곤함에 절로 감기는 눈으로 침대에 누웠는데 좀 전의 술자리가 생각났다. 지나간 내 젊은 시절도 떠올랐지만 30대 그녀가 자꾸 떠올랐다. 27에 결혼해서 지금은 9살, 7살 남매를 키우는 38의 젊은 엄마. 직장 다니며 대학원 공부를 시작한 남편얘기를 하며 미워죽겠다고 웃던 그녀.
내가30대일 때는내가 가진 모든 에너지를 자식 키우는데 집중하느라 남편이 눈에 안 들어왔다. 내게 에너지를 보태지 않으면 화가 나고 원망스럽기만했다. 맞아, 그랬었지. 그 힘들던 육아 시절이 지나고 나서야 남편을 향한 애정이 생겼다. 젊을 때와 또 다른 결과 색으로 그 힘든 시절을 함께 지나온 남편을 사랑한다. 그러니 당신도 힘내라고 말해주면 좋았을걸, 하는 생각을 조금했다가, 무슨 꼰대같은 소리야 하고 이불을 끌어올려 잠에 들었다.
느지막이 일어난 토요일 아침, 남들은 가을을 즐기기 위해 야외 곳곳을 향해 이른 아침부터 출발했을 날씨다. 역시나 우리집은 아무도 일어나지 않았다. 혼자 부엌에 가 컵라면에 물을 부었다. 딱히 배가 고픈 것도 숙취가 있거나 해장이 필요한 것도 아닌데 그러고 싶었다.
어젯밤에는 간만의 술자리가 즐겁고 재밌었다고 생각했는데, 왠지모르게 아침이 되니 모든 게 헛헛했다. 쓸데없는 시간이었다는 마음이 아니라 내가 비어있다는 느낌이 더 가깝다. 내가 채우고 있는 것들이 사실은 중요한 본질과 상관없는 건 아닐까, 더 충만한 무엇을 담아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마음이 자꾸 생겼다. 이런 마음을 허무라고 부르려나. 허무. 친정엄마의 파김치를 곁들여 라면을 먹으면서 계속 이 단어가 입안에서 씹혔다. 오래도록 버려두고 있었던 신앙에 대한 갈증일까?
천천히 마지막 국물까지 다 마시고 젓가락을 내려놨다. 여전히 채워지지 않았다는 본능적인 느낌. 무언가 부족한 느낌이 사라지지 않았다. 앞으로 내 남은 50대를 어떻게 보낼지 고민하라고 허무가 내게 찾아온 것 같다. 무엇으로 어떻게 채울지, 무엇을 선택하고 어디에 집중할지 고민하며 앞으로 발을 뻗으라고 누군가 등을 밀어주는 것 같다. 지난 시간들 처럼 흘려보내지 말고 충실하게 50대를 보내라고 말이다.
식탁을 치우고나서 베란다에서 길게 들어오는 햇살을 만끽하는 식물들에게 영양제를 담뿍 담아 물을 주었다. 여름에 시들했던 아이들이 조금씩 살아나고 한여름 무성하게 자란 아이들은 여전히 싱그럽게 잎을 빛내고 있는게 보였다. 축제의 가을을 위해 뜨거운 봄여름을 보내지는 못했지만 겨울의 끝마무리를 위해 가을을 잘 보내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오늘 느낀 이 허무를 잘 들여다보며 50대를 잘 채워나가고 싶다. 겨울이 오기 전에 가을이 있어 얼마나 감사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