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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어라 Jan 24. 2022

출퇴근길 버스 안에서

 나는 버스로 출퇴근을 한다. 매일 같은 시간에 같은 버스를 타는 규칙적인 사람은 아니라 버스 안에서 인연을 맺는 드라마 같은 일은 겪어 보지 못했다. 그래도 비슷한 시간대에 비슷한 목적지를 가는 사람들과 한 버스 안에 잠시 있는 인연으로 나 혼자 저마다 지닌 삶의 무게를  짐작해보곤 한다. MBTI 확신의 N답게 줄 서서 기다리는 아저씨의 뒷모습을 보고 아침에 가족들과 인사를 하고 나왔을까 그냥 나왔을까 상상해보기도 하고, 자리에 앉아 핸드폰 게임을 하는 학생을 보며 아침을 먹고 나왔는지 어느 학교에 다닐지를 궁금해하기도 한다. 영화 <감시자들>의 한 장면을 상상하거나 '셜록 홈즈'처럼 버스에 탄 다른 승객들의 하루를 추리 해보다보면 어느새 벨을 눌러야할 때가 된다. 물론 멍하니 창 밖 풍경을 바라보며 머리를 비울 때도 많고 포켓몬 고를 하거나 웹소설을 읽으며 갈 때도 많다. 눈을 감고 잠깐 쉬거나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금방 내릴 때가 다가오고 버스 바깥의 공기를 마시는 순간 늘어나 있던 줄자가 휘리릭 감겨드는 것처럼 순식간에 상상의 세계에서 현실로 돌아온다. 




 아침 출근 시간대에 타는 버스 중 26번은 시 외곽에 있는 특성화고까지 가는 버스다. 아침에 집에서 조금 늦게 나오는 날이면 등교하는 아이들로 꽉 찬 버스를 타게 된다. 아이들은 아무렇게나 버스 좌석에 몸을 구겨넣고 핸드폰으로 동영상을 보거나 창문에 고개를 부딪혀가며 잠을 자고 있다. 그도 아니면 친구와 나란히 서서 손잡이를 잡고 흔들리고 있다. 하교 시간에는 수다를 떨거나 활기에 가득 차 있을지 모르겠지만 등교하는 시간의 아이들은 어딘지 모르게 피곤함이 묻어있다. 배차간격이 40분이 넘는 이 버스를 타고 등교하기 위해 아침 일찍 나왔을 학생들이 안고 있는 커다란 가방을 보면 오래 전 입시에 지쳤던 고등학생일 때가 떠오르고, 조금이라도 편히 자라고 꺽인 고개를 받쳐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 


 이용객이 많지 않아 여유로운 8번 버스는 내가 자주 이용하는 노선이다. 몇 달 전 쯤 퇴근길이었다. 사람이 많이 타고 내리는 정류장에서 천천히 앞문을 올라오신 할머니 한 분이 카드를 단말기에 대셨다. 그때 나는 멍하니 창밖을 보고 있었는데, 잔액이 부족하다는 메세지가 들렸다. 할머니는 맨 앞 자리에 앉으셔서는 운전기사님을 바라보며 조그만 목소리로 “어쩌나…돈이 없는데……”하시며 맨 앞자리에 앉으셨다. ‘할머니 어쩌지’하고 생각하는 찰라, 나보다 훨씬 뒷 자리에 앉아 있던 고등학생이 앞으로 나오더니 “제 카드로 결제해드리면 될까요?”하고 기사님에게 물었다. 기사님은 괜찮으니 학생에게 자리에 앉으라고 하셨다. 

“할머님, 다음에는 카드 준비해서 타세요. 차 출발합니다.”

학생은 자리에 앉았고, 기사님은 다시 운행을 시작하셨다.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바로 할머니를 돕기 위해 일어난 학생이 어찌나 기특하고 고맙던지. 우리 아들이 꼭 저렇게만 자라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일어나서 도와드릴 생각을 못한 느린 나를 탓하기보다 학생이 대견해서 타고 가는 내내 마음이 따뜻했고, 그 학생이 내리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마음으로 축복해주었다.



 언제나 굳은 얼굴로 타고 내리를 승객들에게 일일이  인삿말을 건네는 다정한 기사님들도 많이 계셨다. 일방적인 인사가 아니라 충분히 마음이 전해지고 있다고 알려드리고 싶었지만 누가 흉보는 것도 아닌데 소리내어 인사하는게 괜히 부끄러웠다. 탈때는 가벼운 목례가 가능하지만 내릴때는 제법 목소리가 나야 운전석에 계시는 기사님께 들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리내어 인사하고 후다닥 내린 적도 있었다.

32번 버스에는 늘 타고 내릴 때마다 인사를 건네시는 기사님이 계신다. 머리는 하얗게 세셨지만 괄괄해보이는 인상에 몸집도 크신 것이 꼭 드라마 속의 형사반장 캐릭터가 떠오른다. 늘 인사를 건네셔서 따스한 분이시겠거니 혼자 짐작했었는데 승객들이 많이 몰리던 어느 날, 그 분의 본 모습을 발견했다. 혼잡한 출근 시간, 누군가가 앞 문으로 승객들이 몰리자 뒷문으로 승차를 한 모양이었다. 차가 출발하자마자 기사님이 매우 화가난 목소리로 크게 얘기를 시작하셨다.

“제가 하나만 얘기 할게요. 그렇게 뒷문으로 타는거 양심없는 겁니다. 그러다가 다치면 다 기사 욕하고 책임지라고 한다고요. 앞문으로 기다렸다가 타라구요. 도대체 왜 그러는겁니까? 몇 번을 얘기하냐구요! 아 진짜, 사람들이 말이야 꼭 좋게 말하면 안 듣고. 앞문으로 기다렸다 타는게 안되나?” 

뒷문으로 승차하는 사람에게 경고하는 것도 주의 주는 것도 아니었다. 욕만 안했다 뿐이지 버스 안에 타고 있는 모두에게 호통을 치면서 화를 내셨다. 다음 정거장에 도착할 때까지 불평과 경고는 계속 됐다. 정거장에 버스가 서고 문이 열리자 기사님은 다시 인사를 시작하셨다.

 “안녕하세요, 안녕히 가세요. 안녕하세요.”

아까까지의 불퉁함이 남아 있는 목소리로 기계적으로 인사가 나오고 있었다.

차라리 인사를 마시 지. 지금까지의 인사도 반복적인 인사일 뿐 마음이 담긴 인사가 아니었겠구나 싶어서 마음이 껄끄러워졌다. 오히려 그런 기사님의 모습을 화가 난 상태에서도 인사를 건네는 투철한 직업정신으로 이해해야하는건지 모르겠지만 내 마음은 개운치 않았다. 며칠 후 같은 버스에서 같은 기사님을 만났을 때, 이번에는 인사가 나오지 않았다.



 버스 안에서 따스하고 정겨운 일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옆좌석에 커다란 가방을 놔두고 치울 생각을 않는 이기적인 사람이라거나 큰 소리로 통화를 계속하는 배려없는 사람도 많았다. 거친 난폭운전으로 조마조마하게 한 기사님도 물론 있었다. 하지만 지금껏 버스 안에서 만난 대부분의 사람들은 조금의 불편함은 참고 다른 사람을 배려했다. 아이와 노인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짐을 들어주고 벨을 대신 눌러주는 사람들. 타고 내리면서 인사 나눌 줄 알고 작은 친절에도 감사하다고 인사하는 사람들. 매일 스치는 모르는 타인들이 이렇게 다정해서 참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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