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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어라 Sep 25. 2022

시간 위로 자국을 남기며 사랑이 끝났다.

아주 오래 전 어느 사랑의 마지막

오늘 그가 헤어지자고 말했다.

“농담 하지 마.”

“농담 아닌데.”


평소와 전혀 다를 것 평범한 없는 억양, 평소와 전혀 다를 것 없는 여상한 목소리. 빙긋 웃으며 그가 다시 한 번 말했다.


“이제 안 사랑하는 것 같아.”

‘같아’라니, 그답지 않은 말이었다. 그제사 나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신의 목소리를 들었다며, 그런 사랑이라며?”

"그땐 그랬는데, 지금은 아니야.“


양재역 벤치에 앉아 이 사랑을 긍정하기로 결심했다던 그가 불과 백일도 안 되어 사랑이 식었다고 말하고 있었다. 어째서일까? 정말일까? 진심일까? 그는 지금 무슨 생각일까? 운전석에 앉은 그의 옆에 앉아 무수히 떠오르는 물음표들만 하나씩 붙들고 있는 사이, 뜨고 있는 그의 목도리가 생각났다. 오로지 검은색만 입던 그에게 변화를 주고 싶어 고른 짙은 남색 손뜨개 목도리. 1월인 그의 생일에 주려고 한 코 한 코 서툴게 무늬를 넣어가며 정성들여 뜨고 있던 목도리다. 목도리가 떠오르자 그 밖에 다른 질문들이 다 사라져버렸다. 세상은 온통 목도리로 가득 찼다.


“잠깐 기다려봐.”


차문을 열고 나와 집으로 올라갔다. 늦게 돌아올 줄 알았던 딸이 이른 저녁 시간에 갑자기 들어와 놀라시는 부모님을 뒤로 하고 방에 들어가 목도리를 챙겼다. 눈에 띄는 종이봉투 아무거나 잡아들고 털뭉치까지 챙겨 바늘 채로 쑤셔 넣었다. 아직 완성도 못했는데. 뜨다 만 이 목도리는 어떻게 하나.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다시 차 문을 열고 조수석에 앉는 동안도, 내내 미완성인 목도리만 생각났다. 이게 무언지 눈으로 묻는 그에게 건네며 말했다.


“생일선물로 주려고 뜨던 거야. 너 주려고 뜨던 거니까 네가 가져가.”

어제와 다름없이 선하게, 그러나 약간 곤란한 표정으로 웃더니 그가 봉투를 챙겼다.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갑자기 마음이 바뀌었다.


“아냐, 이리 줘. 다시 생각하니 화형 시켜야겠어. 그냥 태워버릴래. 아무 쓸모도 없는데.”

“그러지마, 계속 보고 생각하지 말고 그냥 잊어버려. 내가 가져갈게.”

그의 말에는 주술적인 힘이 있는 것 같다. 그의 한마디에 태워버리겠다고 화르륵 타올랐던 마음이 순식간에 재가 되어버렸다. 그래서인가 헤어지자는 데도 애원하거나 붙잡을 생각이 안 든다.


목도리를 주고 나자 더 이상 나눌 말이 없었다. 이제 정말 헤어질 순간이 와버렸다. 가만히 앞만 바라보던 나는 작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잘 가’라는 인사와 함께 차에서 내렸고, 내 목도리를 실은 차는 그대로 떠나갔다.   

   

모든 사랑이 다 그 시작을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모든 사랑의 종말은 선명하게 시간위로 자국을 남긴다. 오늘, 사랑이 끝났다. 쓰레기봉투에 담겨 버려질 미완의 목도리처럼 내 사랑은 그렇게 쓰레기장에 쳐 박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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