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은 다르게 적힌다

오감

by yErA

밀도 높은 하얀 연기가 쏟아질 때면 난 어릴 적 공포를 끄집어낸다.


방역을 위해 연막 소독기를 단 소독차가 온 동네방네를 돌아다니며 희뿌연 연기를 마구 쏟아낼 때면 꼬마였던 난 어김없이 화장실 문을 꼭 걸어 잠그고, 그 안에서도 제일 깊숙한 곳에 몸을 웅크렸다. 친구들은 소독차를 정신없이 쫓아다니며 그 연기 안에서 정신줄을 놓았겠지만, 나는 소독약을 최대한 빨리 피해 목숨을 유지해야 하는 벌레처럼 숨기 바빴다. 끊임없이 뿜어대는 소름 돋는 연기와 온몸을 울리는 굉음, 그리고 매캐하고 고약한 냄새는 어린 내겐 공포 그 자체였다.

하지만 그 불쾌한 허연 연기는 울 아빠, 엄마에겐 그들의 달달하고 아련한 육아일기에서 겁쟁이 귀여운 막내딸을 떠올리는 유쾌한 기억의 한 조각이다. 공포와 귀여움의 간극은 커도 너무 크다.


상상하기 힘들지만 나의 어린 시절엔 모든 동네 주민들이 함께하는 대청소 날이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낮은 아파트라 가능했던 건지 아니면 이웃집 숟가락 개수까지 알만큼 가깝게 지냈던 이웃들이 그들의 화합을 확인하기 위한 행사였는지 알 수 없지만 다 함께 정한 모일 모시에는 모두가 아파트 청소를 위해 손발을 걷었다.


맨 꼭대기 층에 사는 이웃이 대문 앞을 닦고 물을 쏴하고 내려 부으면 그다음 층이 이를 이어받아 청소하는 일종의 파도타기 식의 청소였다. 청소가 진행될수록 저층으로 쏟아지는 물의 양은 계속 불어났고 2층인 우리 집 앞에서는 작은 폭포가 만들어다.


어린 내게 복도와 계단의 묵은 때를 모두 쓸고 내려오는 거무튀튀한 물은 달갑지 않았을게 분명하다. 그 안에 무슨 더러운 쓰레기와 벌레가 담겨있는지 알 수 없는 노릇 아닌가.


하루는 이 정신없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 난 옥상으로 몰래 숨어들어 먼발치에서 물 잔치를 바라봤다. 그래서 그런지 물청소는 내 기억 속에 마냥 나쁜 곳에만 자리 잡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우리 부모님, 특히 울 아빠 기억 저장소에는 꽤 다르게 적혀있다. 아빠는 갑자기 사라진 꼬마 막내딸을 찾기 위해 물청소 장소를 진작 벗어나 온 동네방네를 정신없이 헤맸기 때문이다.


이렇듯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서 같은 경험을 하더라도 우리는 다른 기억을 담는다. 물론 기억의 조각을 함께 저장했다는 전제 하에서다.


그때 겁 많은 꼬마는 지금 한 아이를 키우는 엄마다. 아이와 함께 만들어낸 수많은 장면들이 서로의 저장소에 다르게 적히고 있을 게 분명하다. 내겐 무심히 흘려간 장면이 아이는 따듯하게 간직할 수도, 그렇지 않으면 꽁꽁 숨겨놓은 채 혼자 살며시 꺼내 아파할지도 모르겠다.


무수한 장면이 더하고 더해져 아이는 아이대로 나는 나대로 각자의 인생 그림을 그려갈 테지만, 함께 보낸 그 시간과 공간을 통해 채우는 조각들이 서로 너무 다르지 않았으면 한다.


오감을 통해 차곡차곡 쌓이는 감정들, 그를 통해 생성되는 기억의 조각들, 이들이 날실과 씨실처럼 엮여 하나의 파노라마로 이어질 때 적어도 비슷한 장르였으면 한다. 나는 달달함이 가득한 사랑 이야기인데 아이는 서스펜스 스릴러라면 좀 그렇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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