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이 인생에서 닮고 싶은 인물을 하나쯤은 가지고 있다. 나는 삼십 대가 넘어가면서부터 나이가 들어서도 자기 일을 사랑하고 열심히 하는 사람들을 인생의 롤모델로 삼고 있는데, 대표적인 인물로 송은이가 그렇다. 최근, 송은이는 장항준 감독이 연출한 <오픈 더 도어>라는 영화의 투자자가 되었다. (그의 회사 ‘비보'에서 장원석 대표와 함께 공동 투자를 했다) 영화 시사회 때 한 기자가 ‘코미디언, 방송인, 회사 대표를 넘어 이제 영화 투자자까지 영역을 확장해나가고 있는데 어디까지 해보고 싶으냐'는 질문을 했다. 이에 그는 자신이 하는 일들이 다 다른 일처럼 보이겠지만, 실은 ‘창작'의 범주에 있는 일들이며 앞으로도 창작과 관련한 일들을 시도해보고 싶다고 답했다.
갑자기 왠 송은이 얘기를 꺼냈냐면, 책을 한 권 만들고 보니 ‘내가 하는 일을 뭐라고 설명해야 하지?’ 생각해 보게 된 것이다. 브런치에 <어쩌다 보니 책 디자이너>라는 제목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이전의 나는 강의를 하던 사람이다. 진로를 고민하고 찾아가는 과정에서 ‘나'에 대해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스스로 잘 모르는 모습들을 찾아낼 수 있도록 돕는 일을 했다.
하던 일이 나에게 큰 보람과 의미를 부여했음에도 불구하고 ‘이게 내 길이 맞나?’ 질문하던 시기가 있었고, 코로나가 창궐하던 시기에 나를 발견할 수 있도록 돕는 다이어리를 만드는 일을 하게 됐다. 그리고 다이어리를 만드는 일은 디자인과 편집일을 배우도록 자연스럽게 연결되었다. 그렇게 나는 책 디자이너가 되었다. 고 생각했다.
대부분 자기의 직업을 설명할 때 그 직업의 이름이 명확하면 의심할 것 없이 알고 있는 이름으로 설명하면 된다. 그런데 간혹 직업을 설명하기가 모호한 경우가 있다. 새롭게 만들어진 업이거나, 여러 가지 일을 복합적으로 하고 있어서 하나의 명칭으로 명명하기 어려운 경우가 그렇다. 그럴 땐 자기가 하고 있는 업무를 바탕으로 설명하게 된다. 그래서 내가 하는 일들을 돌아봤다.
나는 출판의 전 과정에서 크고 작게 개입하고 있다. 여기서 출판의 전 과정을 간단히 정리해 보자면 ‘도서 기획, 원고 작성, 표지 디자인, 본문 디자인, 보도자료 작성, 인쇄 전 점검, 인쇄제작, 배본 및 유통, 홍보 및 판매'가 되겠다. 물론, 내 나름 카테고리로 묶어 정리한 것이라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것과 순서가 사뭇 다를 수도 있음을 알린다. 그리고 각 카테고리 안에 적게는 두 가지부터 많게는 다섯, 여섯 가지의 세부 항목들이 포함되어 있지만 굳이 자세하게 적지 않았다.
이렇게 보면 책 디자이너라는 이름으로 하는 일보다 편집자로서 하는 일의 비중이 더 높은 편이다.
개인적으로는 책의 보이는 이미지적인 부분들과 실제 읽었을 때 알 수 있는 내용적인 부분들을 모두 고민하고 다룰 수 있다는 점에서 디자이너, 편집자 일을 모두 하는 것이 매력 있다는 생각을 한다. 일반적으로 디자이너와 편집자가 나뉘어 있을 때, 자기가 표현하고 싶은 것들에 더 우선을 두고 신경전을 하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다. 그런 점에서는 두 역할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다.
반대로, 디자이너와 편집자가 하는 일을 모두 하다 보니 성장하는 속도가 느릴 수도 있고 전문성이 떨어진다고 보일 수도 있겠다. 밖으로 보일 때 전문성을 가진 사람이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그보다 '내가 재미있게 할 수 있는 일인가'를 더 많이 생각하게 된다. 아니 그래서. 내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가에 대해 답을 해보자면 나는 ‘경험 기록을 만들어 파는 사람'이라고 정의하고 싶고 이로써 직무는 바뀌었지만 정작 내가 하고 있는 일은 이전의 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음을 깨닫는다. 앞으로도 역할 구분 없이 지금의 일을 계속하고 싶다. 그렇게 계속 배우는 삶이고 싶다.
송은이 대표가 그렇다. 유명세도, 돈도 아니다. 더 이상 길이 없다고 생각되는 상황에서도 결국 방법을 찾아내는 태도를 닮고 싶다. 여러 가지 일을 하는 것처럼 보여도 그만의 기준이 있다. 그의 삶이, 그의 일이 하나의 큰 맥락 위에 연결되어 가는 것을 느낀다. 그래서 허투루 낭비하는 삶이 없다.
나 역시 일에 맥락이 있었으면 한다. 그것이 일의 기준이 되고 그 기준에 맞는 여러 배움들이 한 곳에 모이기를 원한다. 기준 있는 삶. 어렵지만 추구할만한 가치가 있다. 그렇게 계속 무언가를 배우는 용기가 있고, 그 용기 덕에 내가 하는 일의 재미를 누리는 인생이고 싶다.
인생에 늘 좋은 순간만 있을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방황하는 동안에도 나답게 해석할 수 있는 시선을 가지고 싶다. 그러니 일을 통해 이 시선을 조금씩 키워갈 수만 있다면 내가 디자이너든 편집자든 혹은 대표이든 그 위치는 중요하지 않다. 일을 통해 나만의 결정을 얼마나 많이 하면서 살아가는지, 또 일이 쌓일수록 인생에 대한 성찰이 얼마나 깊어지는지, 나의 일이 나와 내 주변 그리고 사회가 조금이라도 좋은 방향으로 바뀔 수 있게 기여하는지가 훨씬 더 중요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