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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의 노래를 듣는다면

섬세함을 잇다

by 한봄소리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 친구들과의 만남은 줄어들었지만, 혼자 산책을 하는 시간이 늘며 자연과 더 가까워졌습니다. 옹골진 강인함이 느껴졌던 겨울나무 가지들이 맑은 연둣빛 새순을 터트리고, 피었던 꽃이 지고 나면 또 다른 종류의 꽃이 또다시 피어오르고 있는 봄봄. 무심히 한 두 번 지나치며 마주하게 되는 풍경과, 매일 산책을 하면서 관찰하게 되는 풍경은 다릅니다. 나무와 꽃의 섬세한 변화는 경이롭습니다. 직접 온 감각으로 느꼈던 자연의 움틀거림이, 사진으로 담아보면 평면으로 일상처럼 입체감이 사라지는 느낌이 항상 아쉽습니다.


이세 히데코 작가의 그림책을 처음 봤을 때는 장 자끄 상뻬, 이와사키 치히로처럼 맑고 투명한 그림 스타일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책을 읽으면서는 작가 스스로 직접 보고, 듣고, 만나고 경험한 이야기를 촘촘하게 엮은 섬세함이 느껴졌습니다. 겹겹이 쌓아 올린 크레페 케이크와 같다고 할까요. 또한 '나무'에 대한 이야기가 유독 많습니다. 종이책 제본과 첼로에 대한 이야기도 자연스럽게 나무와 연결됩니다. 오랫동안 나무를 그려온 작가의 관찰과 남다른 사랑 때문이겠죠.


나의 를리외르 아저씨


<나의 를리외르 아저씨>는 소피라는 소녀가 소중했던 책이 망가지자 이를 고치기 위해 를리외르 아저씨를 찾아가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를리외르(Relieur)는 프랑스어로 책 제본가를 뜻합니다. 필사본, 낱장의 그림, 이미 인쇄된 책 등을 분해하여 보수한 후 다시 꿰매고 책 내용에 걸맞게 표지를 아름답게 꾸미는 직업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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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사랑하는 소녀와 책을 고치는 를리외르 아저씨와의 만남. 소녀는 책을 맡기고, 아저씨는 책을 고쳐주면 끝날 수도 있는 이 하루를 특별하게 만드는 힘은 서로에 대한 따뜻한 이해에 있습니다. 를리외르 아저씨는 책 제본을 하는 과정에 대해 설명을 해주고, 소피는 좋아하는 아카시아 나무에 대해 이야기하며 특별한 관계를 맺어갑니다. 나중에 크면 온 세상 나무를 다 보러 다니고 싶다는 소피, 를리외르였던 아버지처럼 마법의 손을 갖고 싶었던 아저씨, 이 두 사람의 꿈이 함께 어우러져 소피의 낡은 책은 새롭게 재탄생합니다.


를리외르의 일은 모조리 손으로 하는 거란다.
실의 당김도, 가죽의 부드러움도, 종이 습도도, 재료 선택도 모두 손으로 기억하거라.
얘야, 좋은 손을 갖도록 해라.


책 제본 과정에 대한 이해와 대를 잇는 장인 정신에 대한 경외감이 소녀와 아저씨의 책을 통한 세대를 넘는 공감으로 전달됩니다. 마지막 장에 '를리외르 M 씨에게 바친다'며 책을 만들게 된 계기와 과정을 소개하는 저자의 말이 담겨있습니다. 기술의 발달로 수작업으로 하는 제본하는 를리외르가 사라져 가지만, 문화를 미래로 이어준다는 그들의 긍지와 열정을 담고 싶었던 작가의 진정성이 이 책을 봐도 또 봐도 새롭게 느껴집니다.


여행 도중에 그림을 그리도록 날 강하게 끌어당긴 것은 ‘읽을거리’라는 문화를 미래로 이어주려는 마지막 아르티장(직인)의 강렬한 긍지와 정열이었다. 수작업 과정 하나하나를 스케치하고 싶어서 파리에 아파트를 빌려 몇 번이나 뒷골목 공방을 찾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책은 시대를 넘어 몇 번이라도 다시 태어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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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개의 바람 천 개의 첼로


음악을 좋아하는 분들에게 소개하고 싶은 책으로 <천 개의 바람 천 개의 첼로>, <첼로 노래하는 나무>가 있습니다. 이세 히데코는 열세 살 때부터 첼로를 켰고, 그 후로 얼마나 나 자신을 격려할 수 있었는지 모른다고 얘기합니다. 작가의 첼로와 음악에 대한 섬세하고 따뜻한 마음이 느껴지는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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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 히데코는 1998년 고베 대지진 복구 지원 자선 행사인 '천 명의 첼로 음악회'에 참가합니다.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완성한 그림책이 <천 개의 바람 천 개의 첼로>입니다.


img_03.jpg 1998년 고베에서 열린 제1회 1000명의 첼로 콘서트


인간의 모양을 한 악기, 인간의 목소리로 노래하는 악기, 첼로.
첼로를 켜는 사람의 모습은, 사람이 자신의 그림자를 껴안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펼쳐졌다가 겹쳐지는, 파도 같은 천 개의 활이 마음을 담고 기도를 담아 멜로디를 이어간다.
한 조각, 또 한 조각 풍경들이 첼로 소리가 되어 흐르던 음악회.
한 사람, 한 사람, 이야기는 달라도 마음을 합하면 노래는 하나가 되어 바람을 타고 흐른다.
그리고 틀림없이 누군가에게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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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의 기억 속에서, 희망을 노래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름답습니다. 자전적인 이야기도 어린이의 눈높이에서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도 이세 히데코 작품의 특징입니다. 소년은 강아지 그레이가 사라지고 나서 아빠로부터 첼로를 선물로 받습니다. 우연한 만남으로 소년은 대지진의 아픔을 갖고 있는 할아버지, 첼로 교실 소녀와 함께 대지진 복구 지원 음악회에 나가게 됩니다. 보이지 않는 그레이를 껴안고 첼로를 연주하던 소년은 천 개의 소리가 하나의 마음이 되었음을 느낍니다.


실제 1000명의 첼로 연주회 사진과 영상이 궁금해서 찾아봤습니다. 1998년에 1000명이라는 많은 연주자가 연주하고, 사람들을 감동시킨 점에 대해 극찬을 받아 이후로도 2006년까지 5번의 연주회가 개최되었네요. 상상 이상으로 실제 연주를 들으니 그 감동이 남다릅니다. 무대 뒤에 놓여 서 있는 색색의 첼로 케이스 또한 또 하나의 연주자이자 청중처럼 느껴집니다.


"모두 자신의 그림자를 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소중한 또 하나의 자신을......"


1280px-1000cello_hiroshima_2010-05-16-2 (1).jpg 히로시마에서 열린 1000 명의 선수들의 4 번째 첼로 콘서트


https://www.youtube.com/watch?v=L3OCMOaII1Q

1998년 고베에서 열린 제1회 1000명의 첼로 콘서트 영상


첼로, 노래하는 나무


아주 오랫동안 '나무'를 그려 왔습니다. '나무와 사람'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내 손은 늘 나무를 그리고 있었고, 나무로 가득해진 스케치북에서 어느 날, 음악이 들려왔습니다. 아주 작은 소리였지만 그 소리를 열심히 들으려고 노력하며 이 책을 그렸습니다. 음악과 그림이 온전히 하나로 결합된 책. 이 책이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첼로, 노래하는 나무>는 숲, 첼로와 함께 음악에 대해 눈떠가는 소년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소년은 첼로를 만드는 아버지와 아버지가 만든 첼로로 바흐를 연주하는 파블로 씨를 통해 시간을 넘어 모두를 이어 주고 있는 음악을 발견하고, 계절의 변화 속에서 자연의 소리를 귀 기울이게 됩니다.


이 책에서는 다양한 계절의 변화를 나무를 통해 볼 수 있습니다. 새 옹알이를 할아버지에게 배운 봄의 숲, 나뭇가지와 잎 사이로 작은 하늘이 흘러넘치는 여름의 숲, 황금색으로 반짝이는 잎이 끊임없이 춤추는 가을의 숲, 숲과 세계를 통째로 감싸고 있는 눈과 함께 한 겨울의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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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년 이상 살다가 베어진 나무를 보고 소년은 나무가 들었던 이야기에 대해 궁금해합니다. 나무는 악기가 되어 보거나 들은 것을 노래할지도 모릅니다. 책으로, 악기로, 그 밖의 다른 수많은 오브제로 재 탄생하는 나무의 결 속에 숨어 있는 나무의 노래에 귀 기울여 보고 싶어 집니다.


를르외르 아저씨의 책을 받고 기뻐하는 소피를 그리며 며칠 전 경복궁에서 그려 본 소나무를 떠올려 봅니다. 소나무의 잎과 가지가 너무 많아서 그리기 어렵다고 투덜거렸었죠. 하지만 하늘을 향해 뿜는 나무의 올골찬 기운에 매료되었습니다. 이젠 나무가 겪어왔을 이야기에, 소리 없이 전달되는 노래를 더 가까이 들어봐야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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