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오는 우편물을 받을 때면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이었다. 장모님이나 처제는 이따금 먹을거리를 이역만리 마이애미로 보내셨다. 덕분에 냉동실 가득 채우고 한동안 걱정 없이 식사를 준비할 수 있었다. 타지에서는 잘 먹고사는 것도 일이라, 한 번씩 받는 한국의 먹거리는 우리가 건강하게 지낼 수 있는 힘이 되었다.
나의 본가 식구들이 내가 미국에 머무는 약 2년 동안 보낸 우편물은 없었다. 아무래도 혼자 알아서 잘 살아온 아들에 대한 걱정보다는 미국 땅에서도 당연히 잘 먹고 잘 지낼 것이라는 믿음이 근저에 있었을 것이다. 자취하며 명절에나 집에 가고, 1년에 전화 서너 번 걸어 안부를 전하던 무심한 아들의 표본. 우리는 서로에게 살갑지 않았다.
집에서 소포 한 번 보내지 않은 건, 본가에 들렀다 자취방에 갈 때 귀찮다고 반찬 한 번 챙기지 않던 내 행동이 빚은 결과였다. 그래도 생활비에 보태라고 다 큰 아들에게 매월 용돈을 챙겨주시던 마음에 감사하며 자위했다. 그런데, 처가댁 식구가 아닌 아내 친구가 갖은 먹거리를 챙겨서 보내왔을 때에는, 부끄러움마저 밀려들었다.
상자 안을 채우고 있는 식품들의 종류는 사뭇 다르지만, 고마운 마음은 매 한 가지. 주방에 두고 요리할 시간 없을 때 요긴하게 꺼내 먹을 수 있을 것이다.어리석게도, 이런 감사한 순간, 상자를 뜯고 내용물을 정리하며 오만가지 마음이 스친 것이다. 그렇다고 달라지는 건 없는데 말이지. 정작, 아내는 아쉽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데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