멘토링, 강연할 때의 마음가짐
"홍보 가르쳐주세요!"
무턱대고 배달의민족의 홍보담당자 연락처를 구했다. 그러고선 2015년 당시 잠실에 있던 배민 사무실 앞으로 찾아갔다. 스타트업 업계에 아는 사람이 전무하던 시절, 내가 좋아하는 회사는 어떻게 홍보를 하는지 알려면 직접 문을 두드리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옆에 계신 분 소개해주세요!"
무턱대고 컨퍼런스에 가면 입구에 서서 네트워킹을 하는 스타트업 무리들 틈에 비집고 들어가 인사를 했다. 족히 명함 수십장은 기본으로 주고 받았는데, 가방에 플라스틱 명함통 자체를 들고 다녀야 할 일이 많을 정도였다.
스타트업계에 처음 발을 디디던 신출내기 내 모습은 이러했다. 참으로 씩씩하면서도 무모했다. 몇 년이 지난 지금 똑같이 하라면 못할 것 같다. 그런데 다시 그 때로 돌아간다면 나는 똑같이 행동할 게 뻔하다. 스타트업의 주니어 1인팀이 실무와 업계 생태계를 배우는 방법은 다양하겠으나, 당시 내가 가진 자산은 두꺼운 낯짝밖에 없었다. 더 세상을 보는 시야와 지식이 넓었다면 조금이나마 수월했을텐데, 무식하게 맨땅에 헤딩하는 방법을 스스로 많이 택했다. 비록 90%의 시도가 실패와 실수였다고 할지어도 그 자체의 (경험하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배움들이 꽤나 많이 쌓였다.
운이 좋게 이제는 다양한 온오프라인 채널에서 나의 경험을 이야기할 기회도 종종 찾아온다. '강연', '멘토링', '오피스아워'라는 명목으로 나설 때가 있는데, 내가 누군가에게 조언을 줄 깜냥이라고 생각하니 한없이 염치가 없다. 하지만 '초기 스타트업의 성장을 돕거나 그들의 고민을 듣는다'는 목적이라면 크게 마다할 이유가 없다. 내 낯짝을 더 두껍게 해서라도 적극 환영하는 편이다. 나를 포함해 스타트업의 성장을 고민하는 사람들끼리 직접 만나 그 와중에 서로의 솔직한 경험을 덧대는 것 자체로도 큰 가치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멘토나 강연자라고 해서 배움과 동기 부여를 안 받는 게 아니다.
부끄러운 고백을 하자면, 몇 해 전 처음 나에게 홍보/브랜딩 멘토링 기회가 주어졌을 때는 정말 엉망이었다. 지금도 어설픈 시행착오의 연속이지만, 처음 1:1 멘토링을 할 적에는 이렇게나 진땀 빼는 일인줄 몰랐다. 나의 결정적 실수는 바로 '나는 모든 것을 알고 있어야 한다'는 멘토나 강연자로서의 부담을 느껴버린 것이었다. 앞에 있는 사람, 즉 멘티가 질문을 했는데 한 가지라도 내가 모르면 나에 대한 큰 실망이 돌아올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더 솔직하게는 나에 대한 업계 평판도 안 좋아질 것 같아 겁이 났다. 그래서 '퍼포먼스 광고 측정은 어떻게 해요?'와 같은 내 직접적인 업무와 동떨어진 질문을 받았을 때도, 나는 내가 아는 한 꾸역꾸역 '있어보이는' 답변을 해댔던 거다. 정작 스타트업의 진지한 고민보다 '나는 모든 질문의 정답을 알고 있어야 해'라는 스스로의 강박관념이 더 앞설 때가 많았다.
역시나 내 속마음은 따로 있었기에, 멘토링이 끝나면 마음 한구석이 개운치 않은 것은 당연했다.
질문 Q. 퍼포먼스 광고 측정은 어떻게 해요?
속마음 A. 왜 나는 마케터가 아니라고 했는데 나한테 마케팅 질문을 하는 걸까?
질문 Q. 보도자료 배포 방법 좀 알려주세요.
속마음 A. 지금 이 대표님은 보도자료를 배포하는 궁극적인 목적도 모르는 것 같은데, 왜 배포 스킬에 대해서만 물어보는 걸까?
사실 처음부터 멘토링에 참여하는 이들에게 전해야 할 답은 명확했다. 나는 그들이 묻는 답변에 무조건 답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답변을 나만의 경험과 해석으로 전달하면 됐다. 이를테면 어색한 마케팅 답변을 하는 게 아니라 ‘지금 기업 브랜딩을 제품 마케팅 관점으로만 보면 안 돼요’ 같은 식의 인식을 바꿔주는 질문 말이다. 보도자료 배포 방법을 알려줄 시간에 지금 놓치고 있는 고민의 포인트들을 짚어주고 함께 아이데이션하는 시간으로 채울 수도 있다. '그것부터 생각하지 마세요!' '헷갈리는 것 같은데 사실 이거예요!'라는 걸 나만의 경험을 곁들여 이야기하는 거다. 지금도 (멘토링을 한다기엔 민망하지만) 정확하게 아는 분야의 질문이 아니라면 아예 어설픈 답변조차 하지 않으려고 한다. 오히려 그 분야의 전문가를 소개하거나 대신 물어봐줄 때도 있다.
이런 훈련은 벤처캐피털(VC)에 다닐 적 어깨 너머로 초기 스타트업과 대화하는 방법을 곁눈질한 덕분에 키울 수 있었다. 다른 VC 심사역이나 대표들은 스타트업의 고민을 어떻게 듣고, 어떻게 함께 고민하거나 일을 해결하는지 옆에 앉아 수도 없이 배워나갔다. 어떤 멘토는 듣기만 하는 유형, 어떤 멘토는 비슷한 고민을 가진 스타트업을 소개시켜주는 유형, 또 어떤 멘토는 직접 그 회사에서 잠깐 일해보며 함께 솔루션을 찾아가는 유형도 있었다. 그렇게 몇 번이나 내 멘토링 방식의 답답함을 삭힌 후에야 비로소 '멘토', '강연자'의 단어가 주는 맹목적인 부담감을 조금씩 내려놓기 시작했다.
그렇게 조금씩 직업으로서 스타트업의 고민을 함께 나누는 역할을 헤쳐나갔다. 한동안, 아니 지금도 나에게 가장 기쁜 순간은 '죠앤 만나고 나서 우리 회사에서 이 고민을 시작했어요!'라고 연락 오는 순간이다. 이제는 이미 거물이 된 스타트업도 꽤 있어서 팬의 한 사람이자 그들로부터 스타트업 성장을 배우는 사람으로서 열렬히 응원하는 입장이 됐다.
다시 처음의 이야기로 돌아와서, 내가 코흘리개 시절에 찾아갔던 배민 홍보담당자와 컨퍼런스에서 만난 사람들은 그 시절 나의 '멘토'였다. (물론 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을거다) 당시 절실함밖에 없었던 나를 내팽개치지 않고 내 앞에 마주앉아 고민을 들어주고, 함께 요리조리 앞날을 강구했던 대화들은 어떠한 비싼 강연보다도 값진 시간이었음이 분명하다.
며칠 전 집 근처 카페에서 혼자 회사 업무를 하고 있었다. 휑한 카페의 내 옆자리에 두 명의 대화가 들렸다. '앗, 스타트업 사람들인가보네' 생각이 든 순간, 나도 모르게 눈 앞의 일은 손을 놓고 그들의 대화만 엿듣게 됐다.
첫 대화를 듣자마자 어떤 관계인지 알 수 있었다. 유명 액셀러레이터(AC) 대표, 시드(Seed) 투자 유치가 필요한 초기 스타트업 대표였다. 몇 번의 이미지 구글링만으로 어디 AC 대표인지 대번 알 수 있었다. AC 대표는 스타트업 대표에게 무언가 답을 가르쳐주려 하지 않았다. 자신이 조금 더 알고 경험했다고 해서 조언을 주려는 의지도 없어보였다. 대신 한참을 '방금했던 당신의 답변을 세 단어로 얘기하면 뭘까요?' 같은 끊임없는 수수께끼 질문형으로 이어졌다.
여유롭게 미소를 지으며 질문을 던지는 AC 대표 앞에서, 그 순간에 나는 한마디라도 멋진 답을 할 수 있었을까? 흥건하게 땀을 흘리며 안절부절 못하는 것이 느껴지는 스타트업 대표는 거진 '잘 모르겠다'는 답변만 하다가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회사 이야기에 푹 빠진듯 했다. '옳지! 그거죠!' 싶은 답변이 나왔는지, 그제서야 AC 대표는 대화 주제를 바꿨다. 이후 그들의 미래가 어떻게 변했을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