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사가/노동이 힘든 사람들

by 조각들

'매출을 늘리고 싶어서'라고 말하지 않고 '장사가 힘들어서'라고 어떤 사람이 말했다. 장사가 힘들다는 것은 수사적 표현이지 사실에 대한 서술일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녀는 장사가 힘들다고 말했다. 그 말이 너무 슬프게 다가왔다. 장사가 힘들다는 건 뭘까. 힘들지 않게 된다는 것은 뭘까. 장사하는 이의 안정을 위해 소비자에겐 어떤 안정이 필요할까. 장사가 힘들지만 계속 해야 하는 이유는 뭘까.


90년대에 동대문에서 옷장사로 살림을 꾸리고 자식들을 키운 부부가 있다. 두타와 밀리오레, 온라인 쇼핑몰의 흥행과 함께 장사가 어려워졌다. 그들은 마흔이 넘은 나이에 제단사로 직업을 바꾸고 20년 정도 성실히 일하며 자녀들을 결혼시켰다. 그런데 중국이나 동남아의 공장식 대량생산 패션 때문에 환갑이 넘어서 다시 미래를 생각하게 되었다. 그들은 남은 여생을 시골에 제단 봉사 여행을 다니려고 계획한다. 시골의 어르신들에게 필요한 옷 수선이나 봉제를 해드리고, 필요하면 집수리도 해드리는 젊은 꿈을 꾼다. 그들은 삶이 힘겨웠다고 말하지만, 서울에 집도 마련했고 강원도에 작은 세컨하우스도 지었다.


뼈빠지게 일한 아버지가 생각났다. 그의 노동 후 남은 것은 무엇인가. 나는 그에게 어떤 삶을 보답할수 있는가. 나는 사랑의 의미를 묵상한다고 하지만, 내가 실천해야 할 사랑의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나 또한 노동자로 태어났으니 뼈빠지게 일하고 부모의 은혜를 갚으려 애써야 하는 것 아닌가. 위대한 뭔가를 하지 않아도 그냥 가족들을 위해 벌어먹다가 늙어 죽으면 되는 거 아닌가. 누군가의 아들이나 남편이나 친구나 아빠로 살다 떠나면 될 것 아닌가.


<숲속의 자본주의자> 마지막 챕터를 판교의 한산한 동네 카페에서 읽는다. 삼십대로 보이는 어떤 남자가 혼자 운영하는 조용하고 정돈된, 하지만 장사가 잘 될지 의심스러운 곳이다. 내가 그날의 마지막 손님이었고, 마감시간 즈음 어떤 아리따운 새하얀 여인이 카페에 왔다. 그녀는 갓 난 아기를 안고 있다. 카페 사장의 아내다. 셋은 잘 살 것 같다. 그 사장을 향한 나의 염려는 무의미해보인다. 카페 유리창에 거울처럼 비친 나에게 필요한 염려다.


조조할인과 통신사 혜택으로 영화 <어쩔수가없다>를 봤다. 삶의 진실을 후벼파는 내용이다. 전체 길의 3분의 2지점에서 극장을 뛰쳐 나가고 싶어졌다. 영화가 말하는 그 현실세계에서 내 삶을 마주하고 싶었다. 풍자를 바라보며 헛웃음을 짓고 있기 어려웠다. 그렇지만 견뎠다. 삶이 허무하다는 느낌이 영화 말미에 들어서 힘들었다. 소설 <스토너>를 읽었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다. 거울처럼 나 자신을 보는 것 같은데, 나를 깨우치는 것이 아니라 슬픔에 잠기게 만드는 것. 삶이 별것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지만 그것이 나의 목을 자르는 듯한 느낌이다. 현실자각과 자기연민이 나를 구원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인가, 영화를 본 그날 작가 히무로 유리의 <오늘의 기쁨> 전시 티켓을 환불했다. 오늘의 기쁨을 깨닫는 것이 나에게 시급한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2인 티켓이 저렴해서 예매해두고 기회가 되면 누군가와 가려고 했었다. 누군가와 갈지 모르겠기도 하고, 왠지 후회할 것 같았다.



노동은 고귀하지만, 슬프다.

우리는 어떻게든 노동을 하고

아무것도 남은 것 없이 떠난다.

그 과정에서 만난 친구들과 연인들

모든 기억들,

그리고 그것을 기억해주는 사람들.

하지만 언젠가 모두 사라지는 기억들.

사람이 있었다는 그 사실만이 남을지 모른다.


우리는 왜 수많은 글을 쓰고, 인쇄를 하나.

왜 하루에도 수많은 빵을 굽고, 밥을 짓나.

누가 우리를 그런 존재로 만들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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