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아빠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건 무엇이었을까, 여행의 시작은 취향파악
'파리에서 4박 5일은 있어야 되지 않을까?'
말했더니 엄마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뭘 그렇게 오래 있어? 5일이나 볼 게 있어?'
라고 반문했다.
내가 얼마 전 파리에서 한 달을 있었는데도 아쉬웠다고, 대표적인 관광지 말고도 여기저기 도시를 돌아다니며 볼 것이 얼마나 많은지 이야기하며 설득을 했는데도 엄마는 여전히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엄마의 4박 5일과 나의 4박 5일은 아마도 굉장히 다른 느낌 이리라 막연히 생각했다.
여행은 시작부터 끝까지, 이런 식이었다. 여행지를 고르고, 여행지 안에서 또 어디를 가야 할지 고르고, 그곳에서 얼마의 시간을 보낼지 정하는 것. 여행의 8할은 '결정'하는 것이 아닐까. 취향이 각기 다른 우리 세 사람의 여행은 8할이 결정, 그중 다시 8할이 서로를 설득하는 것이었다.
일단 그래서, 어디로 가야 하지?
여행의 시작은 어디로 가야 할지를 선택하는 것부터였다. 우리의 '유럽여행'이란 많고 많은 국가 중 어느 유럽 국가를 갈 것인가, 그중에서도 어떤 도시를 갈 것인가를 결정하는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시간은 한정적이고 가고 싶은 곳은 너무 많았다. 일단 각자 가고 싶은 곳을 하나씩 써보기 시작했다. 나는 새롭게 가보고 싶은 곳보다 내가 갔던 곳들 중 엄마아빠와 함께 가면 좋겠다 생각한 곳들을 적어나갔다. 프랑스 파리와 덴마크의 코펜하겐, 그리고 스페인 세비야. 지금 생각해보면 '함께' 가고 싶은 곳이라 생각한 이유는 단순히 내가 가장 좋아했던 여행지였기 때문이었다. 엄마는 최근 TV 여행 프로그램에서 보았던 헬싱키와 바르셀로나를 꼭 가보고 싶어 했다. 아빠는 어디든 좋다고 말했지만 나중에 캐묻다 보니 영국이 가고 싶었던 것 같다.
우리는 시간적 제약과 비행시간을 고려해 스톡홀름, 코펜하겐, 헬싱키, 파리, 바르셀로나를 선택했다. 이 과정에서 TV 여행 프로그램을 많이 보는 엄마는 계속해서 가고 싶은 도시를 추가했다. 영국 런던도 가고 싶고 그리스 아테네도 가고 싶은 엄마. 이러다가는 고작 한 달도 되지 않는 여행 기간 동안 하루 한 도시를 찍게 되지 않을까 점점 두려워졌다. 엄마는 '언제 또 갈지 모르는데'라며 투덜댔고 나는 '언제든 또 오면 되지'라고 받아쳤다. 사실 나 또한 언제 엄마아빠와 이렇게 길게 유럽 여행을 할 수 있을까 싶긴 했지만 동시에 그런 생각 때문에 여행이 힘들어진다면 안 가니만 못하다 생각했다.
어딜 갈지만 정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더 큰 문제는 그곳에서 대체 '무엇을 보고 무엇을 할 것인가'였다.
지금까지 나의 여행을 돌아보면 그 도시의 랜드마크를 하루 한 군데 정도 가고 그 이후에는 현지 음식을 먹고 로컬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여유를 즐기는 식이었다. 그렇게만 여행해도 종일 대중교통을 이용하거나 걸어 다니기 때문에 하루 대략 1만 5 천보 정도를 걷게 된다. 나는 평소처럼 다양한 음식점들과 카페들을 검색하고 지인들에게 물어 정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먹고 마시는 것 외에, 엄마아빠는 무엇을 보고, 또 하고 싶어 할까? 곰곰이 생각해도... 특별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박물관과 미술관은 처음에는 흥미롭겠지만 매일 간다면 지겨워질 것이다. 자연을 찾아 하이킹을 다니는 건 몸이 좋지 않은 엄마에게 무리일 듯싶었다. 작은 가게들이 모인 골목을 돌아다니는 건 아빠가 좋아할지 확신할 수 없었다.
엄마아빠는 무엇을 좋아하는 사람들이고 어떻게 시간을 보낼 때 행복해했던가, 나는 가만히 기억을 더듬어 보려 했지만 여전히 어려웠다. 어쩌면 나는 엄마아빠를 너무나 단편적으로만 보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모든 것을 자식들에게 맞춰주었던 엄마와 타지에서 일을 하느라 가족과 함께 보낸 시간이 적었던 아빠. 뭔가를 함께 할 때는 항상 '그래, 나는 다 좋아', '그래, 네가 하고 싶은 것 하자'고 이야기했던 엄마아빠의 진짜 생각을 알고 싶어 졌다.
물론 "엄마아빠, 유럽 가서 뭐하고 싶어?"라는 질문으로 그 대답을 얻어낼 수는 없었다. 때로는 엄마아빠조차 자신들이 뭘 정말 좋아하는지 모르고 있었던 것 같다. 여행을 다니며 "이건 별로네"라는 말을 들으면 열심히 찾아본 내 노력이 아무 의미가 없었나 싶어 순간 울컥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우리 엄마는 이런 걸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구나', '아빠의 취향은 이런 것이구나', 새로운 면을 발견하며 놀라기도 즐겁기도 했다. 엄마는 내 생각보다 아기자기한 물건들을 좋아하는 사람이었고, 아빠는 생각보다 취향이 분명하고 공부하듯이 여행을 즐기는 스타일이었다.
아빠는 여행지에서 받은 책자들을 하나하나 소중하게 정리하고 읽어보았다. 박물관이나 미술관에 가면 헤드폰을 쓰고 작품 하나하나 설명을 듣기도 했다. 엔지니어로 평생을 살아온 아빠는 사실 '학자'에 가까운 스타일이었다. 가끔은 나와 엄마가 어디 방향으로 가든 신경도 쓰지 않고 활자에 빠져들어 버렸다.
엄마는 아주 작은 것들을 좋아했다. 그런 면에서 엄마와 내가 정말 비슷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나처럼 작은 컵과 기념품들을 좋아하지만 돈이 아깝다고 정작 산 것은 몇 가지 없었다. 파리의 랜드마크가 새겨진 기념품 동전들을 소중하게 휴지에 돌돌 말아 가방에 차곡차곡 넣어놓던 엄마의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이런 사실을 여행 전에 미리 알았다면 더 좋았겠지만 겪어보니 그건 여행 전에는 절대로 알 수 없는, 여행을 통해서만 발견할 수 있는 엄마아빠의 새로운 모습이었다. 물론 엄마아빠도 나에 대해 새로 알게 된 것들이 많았다. 어릴 적 엄마아빠의 영향 아래 형성된 내 성격과 취향은 성인이 되고 떨어져 있는 시간이 많아진 지금 완전히 달라진 부분도, 여전한 부분들도 있을 터였다. 이 글은 내 시각에 의해 매우 일방적으로 쓰인 것이니 엄마아빠가 우리의 여행에 대해 쓰게 된다면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펼쳐질 수도 있다. 엄마아빠가 이 글을 보게 된다면 우리 딸 눈에 비친 내 모습이 이랬구나 가만히 생각에 잠기실지도 모르겠다.
누군가와 함께 여행한다는 것은 단순히 '함께 다닌다'는 의미 외에 누군가를 이해하는 과정이란 걸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그 사람이 부모님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이다. 매일 아침 거실에서 마주하는 부모님의 모습과 낯선 여행지에서 숙소를 나서는 부모님의 모습은 완전히 다를 것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