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아빠와 유럽여행, 서로 나누고픈 새로운 여행의 방식과 이야기
나는 선언했다.
"관광지는 하루 최대 두 곳, 식사는 훌륭하게, 카페에서 휴식을 즐깁시다! "
지속가능한 우리의 여행을 위해 내가 감행한 일종의 결단.
하루 커피 두 잔.
딱히 커피를 좋아해서 하루 한 잔 커피를 마시자고 제안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커피숍에 앉아, 특히 테라스 자리에 앉아 가쁜 여행 일정 속에 잠시나마 쉬어가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시원한 커피도 한 잔 마시면서 숨을 돌리고 예쁜 카페 구경, 거리 구경, 사람 구경도 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아빠는 카페에 왜 가는지 도무지 이해를 못한다. 일단 아빠는 평소 달달한 믹스커피만 마시는 데다 도무지 가만히 앉아있는 걸 견디지 못한다. 엄마는 카페는 좋지만 커피값이 조금이라도 비싸면 자기도 모르게 울컥 화가 나는 것 같다.
그래서 우리의 절충안은 카페에 가서 커피를 두 잔만 시키는 것.(대신 디저트를 함께 시킨다) 어느 날부터인가 나는 우리 세 사람이 커피를 한 잔씩, 세 잔 시켜보는 것이 소원이 되었다. 한 잔은 엄마가 좋아하는 아메리카노, 한 잔은 아빠가 좋아하는 달달한 카라멜라떼. 엄마아빠의 취향을 배려하다 보니 내가 좋아하는 라떼는 시킬 수가 없었다. 그래서 슬쩍 세 잔을 시킬라치면 서로 양보하면서 두 잔만 시키자고! 세 잔은 너무 많아서 도저히 다 마실 수가 없다! 하니 언젠가부터 우리는 언제나 커피 두 잔을 나눠마시는 사이좋은 가족이 되었다.
커피를 다 마시고 엉덩이를 들썩거리는 아빠 덕에 카페에서 즐기는 여유도 고작 몇 분 되지 않았다. 그래도 여행이 길어지며 카페에서 아침을 먹기도 하고 다리가 아프면 큰 실랑이 없이 자연스럽게 카페를 들어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의 문화를 엄마아빠에게 전파한 것 같아 뿌듯해졌다.
매일 밤 와인 한 병.
아빠는 유럽의 마트에서 평소와 다르게 매우 신이 나셨다. 마트 한 켠 그득히 쌓인 와인들을 둘러보고 저렴한 가격에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카트에 차곡차곡 와인병을 담는 아빠에게 차마 뭐라 잔소리를 할 수가 없었다. 다만 하루에 한 병, 그 이상은 마시지 않기로 약속했다. 우리는 한국에서는 비싸서 자주 먹지 못하는 안주용 치즈를 잔뜩 사서 하나씩 먹으며 매일 밤 와인을 마셨다. 평소 말수가 적은 아빠는 술을 조금 마시기 시작하면 속에 담아놓았던 이야기를 하나씩 꺼내놓았다.
예전에 함께 살 때에는 아빠가 밤에 술을 마시는 게 싫었다. 엄마는 많이도 아니고 몇 잔 마시는 것이니 봐주자고 얘기했지만 위도 좋지 않은 아빠가 술을 마시는 모습이, 혼자 술을 홀짝이는 것이 걱정되고 싫었다.
아빠는 외항선에서 일하는 기관사였다. 1년에 10개월은 가족과 떨어져 바다 위에서 일했던 아빠는 혼자만의 생활습관과 방식을 갖고 있었다. 어쩌면 1년 365일 붙어 앉아 지지고 볶았던 엄마와 우리 남매 사이에서 어느 순간부터 소외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는지도 모르겠다. 1년에 한두 달, 길어야 세네 달 함께 시간을 보내면 아빠는 또 먼 길을 혼자 떠나야 했다. 아빠는 바다 위에서 아빠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야 했고 우리는 우리대로 육지에서 우리 가족만의 문화를 만들어갔다. 어쩌면 24시간 붙어 다니며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게 된 이런 긴 여행은 아빠에게도, 엄마와 내게도 서로를 다시 생각하고 우리 모두의 문화를 함께 만들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처음엔 아빠가 혼자 앉아 와인 한 병을 다 마시는 게 싫어 옆에 앉아 술을 나눠 먹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와인을 홀짝이며 하루 동안 있었던 시시콜콜한 이야기도 하고 옛날이야기도 했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일단 참는 성격인 아빠는 하루를 마무리하는 밤에서야 와인 한 잔에 그 날 있었던 일들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하나씩 꺼내놓곤 했다. 지금 생각하니 아빠 혼자 앉아 그 와인 한 병을 다 마셔버렸다면 그 날 하려고 했던 이야기들도 와인과 함께 목구멍 너머로 다 넘어가버렸겠다 싶다.
가족만의 문화가 생긴다는 건
가족여행을 자주 가는 가족들도 많다. 하지만 우리는 그동안 함께 여행을 간 적이 거의 없어서 서로의 여행 스타일도, 취향도 모르고 있었던 부분이 많았다. 유럽 여행을 하며 거의 매일 하루 두 잔의 커피, 밥을 먹으며 맥주 한 잔, 하루의 마지막은 항상 와인 한 병을 함께 마셨다. 누군가에게는 그게 무슨 가족의 문화인가 싶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게는 우리 셋이 함께 공유하는 여행 방식이 생기고 그 속에서 좀 더 진솔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기에 이 모든 것을 우리 가족만의 여행 '문화'라 칭하고 싶다. 나는 그동안 항상 가족만의 행사나 문화가 있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악기를 잘 다루는 가족들이 다 함께 모여 작은 음악회를 한다든지 하는 드라마 같은 모습. 그리고 그런 것들은 어릴 적부터 오랜 시간 쌓여온, 누군가의 많은 공이 들어간 것들이라 여겼다. 왜 우리 가족은 그런 멋진 가족 문화가 없을까 섭섭한 적도 많았다.
하지만 이제 우리에게는 쓴 커피 한 잔, 단 커피 한 잔, 이렇게 커피 두 잔을 나눠 마시는 오전, 각자 한 잔씩 맥주를 주문해 마시는 점심, 와인 한 병에 하루의 회포를 푸는 저녁, 이렇게 무언가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우리만의 여행 문화가 생겼다. 함께 시간을 보내고 별 것 아닌 이야기를 나누면서, 또 서로 좋아하는 것을 이야기하면서 생겨나는 우리 가족만의 문화. 거창한 것이 아니더라도 무엇이든 우리 가족의 문화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생긴다는 건 얼마나 멋진 일인가 생각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