놈이 다시 나타났다는 연락을 받고 바닷가로 나갔다. 해녀의 집을 지나 땅끝에 서서 가능한 먼 곳을 바라보며 무엇을 해야 할지 찬찬히 생각했다. 유기견 포획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어 오늘 중 늦게라도 방문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 사이 카페 사장은 남편의 도움으로 놈을 다시 바비큐 비품 창고에 가두고, 전에 빠져나갔던 철문 틈을 석쇠로 막아 놈이 나가지 못하게 해 놓았다는 소식을 내게 알렸다.
집으로 돌아오니 우유(우리집 노견)가 빤하게 나를 본다.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을 감지한 것이다. “우유야. 오늘 우리집에 누가 올 거야. 네 동생인데...... 동생이 좀, 많이 커.” 이실직고를 마치니 방금까지 멀쩡하던 눈을 갑자기 애꾸눈을 하고, 도리질까지 치며 나를 본다. 눈곱인가 아니면 눈에 상처가 났나 싶어 한참 들여다봐도 외관상으로 이상은 없다.
다가올 미래를 온몸으로 표현하고 있는 우유. 사람 품에서 평생 혼자 자란 녀석은 다른 개들과 어울리는 사회성이 없다. 산책을 할 때에도 지나가는 개는 일절 보지 않고 나의 주변만 내내 인공위성처럼 돈다. 그런 녀석에게 들개 출신의 덩치 큰 동생을 선물하다니. 급한 대로 녀석이 환장하는 산책으로 약을 친다. 나가자,는 말에 애꾸눈이 멀쩡해진다. ‘그럼 그렇지. 오래 속이기에는 넌 너무 정직한 개잖아.’
정직한 형, 우유
드디어 결전의 날이다. 서둘러서 회사,가 아닌 치과로 간다. 오늘은 6개월마다 돌아오는 정기검진일이다. 오전 9시, 예약한 시간에 정확히 도착한다. 읍내 치과에서 회사까지는 차로 5분, 놈에게 서두르지 '않기' 위해 사력을 다하는 중이다. 놈의 궁상맞은 자유도 자유라면 그것을 곧 박탈하려는 자로서, 마지막까지 놈이 나를 붙잡지 않을 여지를 주자는 것이다.
치료는 끝났는데 데스크에는 아무도 없다. 그래도 재촉하지 않는다. 할망, 할아방으로 가득한 대기실에서 방언 능력을 키우는 동시에 손에 쥐고 있는 체크카드의 잔고를 떠올린다. 오늘 하루 얼마를 탕진하게 될까. 놈의 치료비가 관건이다. 심장사상충이나 다리 골절로 곧장 입원이나 수술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이백만 원? 삼백만 원? 나는 탈마이너스의 삶을 꿈꾸며 제주에 내려왔다. 그리하여 신용카드, 대출, 폰 기기 할부금 등 마이너스를 띈 모든 것들을 털어냈다. 현재 내 인생에는 마이너스가 없다. 하지만...... ‘신용카드를 다시 만들겠지? 월급이 통장을 스치는 과거가 부활할 거야. 연세(일 년치 월세)는 어떻게 마련하고? 머리칼이 하얘지고 한 올 두 올 빠지다가 민머리가 될 때까지 빚만 갚다가 죽겠지.’ 어둠의 생각이 줄을 잇는다.
“10,700원이우다.” 뒤통수에 선 간호사가 나를 부른다. ‘그래도 내 이가 나를 살려주는구나. 치료비가 고작 10,700원이래. 아하하.’ 명랑해지고 싶어서 거의 운다. ‘그래, 받아들이자. 앞으로 우리에게 벌어지는 일은 내가 감당한다.’
창고에 가보니 놈이 실신해 있다. “이 새키야!(막상 놈을 보니 격양되었다) 이럴 걸 왜 기어나가서 두 번 고생을 하냐.” 놈이 번뜩 눈을 뜬다. 내가 너무 격했다. 카페 사장이 놈을 쉬게 해줘야 한다고 카페로 가자고 한다. “나가지 마, 새키야! 거기 딱 그대로 있어! 허튼 생각하지 마!” 창고에 바싹 섰다가 카페로 끌려왔다.
이후 카페 사장과 함께 무한정 포획팀을 기다렸다. 놈이 잡혀가는 것을 지켜보지 못하겠다던 카페 사장은 퇴근을 하며 내게 카페 열쇠를 맡겼다가 이내 손을 거두었다. 끝까지 자리를 지키고 싶은 것이다. 문득 회사 내 카페를 운영하고 있는 이 부부의 마음은 뭘까 생각했다. 굶주린 개가 자신들을 찾아왔다, 안타까워 먹이를 주다 보니 정이 들었다, 회사에서 제재가 들어왔고 책임을 져야 하는데 지지 못하는 상황에 봉착했다, 애를 먹던 중에 개를 거두겠다는 사람(나)이 나타났다......
다행이고 미안하고 최선을 다해 후련해지고 싶을 것 같다. 서운하지는 않았다. 털어내려는 마음보다 책임지지 못한 미안한 마음이 더 크게 느껴졌다. 애써주는 것이 나에게 도움이 되니 그저 고마운 일이다. 절절한 상황 속에서 각자가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면 되는 것이다.
포획팀 차량이 도착했다. 차갑고 뻣뻣한 두 명의 남자 직원을 놈이 있는 창고로 안내했다. 놈은 낯선 사람이 들어와도 의외로 꼼짝 않고 누워서 이들을 경계하지 않는다. 마취총 없이 포획이 쉬워질 수 있겠다 싶어 한숨을 놓는 순간, 산적처럼 생긴 직원이 트럭에서 올가미를 들고 나타나자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놈이 버둥댈 기미를 보인다. 그리고 놈이 자리를 박차려던 때에 올가미가 순식간에 놈의 목을 감는다!
발버둥 치며 트럭으로 끌려가는 놈을 보고 카페 사장은 기겁을 하고 개를 살살 다루어 달라고 남자들에게 악을 쓴다. 언짢은 직원이 둘 중에 신고자가 누구냐고 묻는다. 간섭은 놈을 더 힘들게 할 뿐이다. "접니다!"라고 박력 있게 답하고 그들의 일을 최대한 소리 없이 지켜본다. 목덜미가 잡히고 허리가 안긴 채로 틀에 실리는 놈은 얼음장처럼 굳었다. 같은 틀 안에는 이미 다른 놈도 있어서 상자에 고체 덩어리 두 개가 든 것 같다. 옆의 또 다른 틀에는 어제까지 사람의 손길이 닿았을 고운 소형견 한 마리가 발발 떨고 있다. 이놈의 팔자소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