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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한밤중에 방문을 닫는 이유

19호실로 가다

by 존치즈버거


To. 친애하는 코튼 킴


“엄마, 나 방에 혼자 있고 싶어.” 어둠을 유난히 무서워해서 그리 크지 않은 집 안 복도를 걸을 때도 나를 불러대면서 요즘은 부쩍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어 하는 너. 살포시 방문을 닫으며 나는 생각해. ‘언제 이렇게 컸지?’ 혼자 있고 싶다는 건 이제 너에게도 혼자여야만 온전히 돌볼 수 있는 자아가 생겼다는 말이겠지. 서운하냐고? 전혀. 누구나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한 것임을 엄마는 누구보다 잘 알거든.


엄마도 가끔 방문을 닫아. 한밤중에 깨어난 장난감들이 자기들끼리 파티를 벌일지 모른다는 상상에 빠져 있는 너, 사실 파티를 벌이는 건 장난감이 아니라 엄마야. 깨금발로 조용히 어둠 속으로 나온 나는 아빠가 곤히 잠든 안방과 너의 방에 문을 닫고 거실 소파에 앉아 있지. 음악을 듣는 날도 있고 군것질을 하기도 하고 글을 쓰거나 영화를 보기도 해. 거실 스탠드 하나만 켠 채로 맥주까지 한 잔 하면 이보다 더 좋은 휴가가 없단다. 다만 요즘은 체력에 한계가 와서 그 주기가 길어지고 있지만. 어쨌거나 하루 중 엄마에게 주어진 유일한 혼자만의 시간이야. 물론 네가 등교를 할 때도 혼자 있지만 낮에는 처리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거든. 역할과 역할 사이에서 고군분투를 하고 나면 조용한 밤이 얼마나 기다려지는지 몰라. 엄마가 만약 지금보다 더 큰 집을 원한다면 그건 재산증식보다는 완벽한 나만의 공간을 향한 욕망일지도 모르겠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어. 엄마가 혼자의 시간을 바라는 이유는 너나 네 아빠와 있는 게 싫다는 말이 아니라는 걸. 너도 알잖아. 네가 혼자 있고 싶은 시간이 엄마, 아빠와 있는 시간에 대한 반항이 아니라는 걸. 사람은 누구나 혼자 있을 시간과 공간이 필요해. 남들에게는 보이고 싶지 않은 감정들도 있을 테고 고요히 나 자신을 마주해야 할 상황들도 있으니까. 혼자 있는 시간은 외로운 시간이 아니라 내가 내 옆에 같이 있어주는 시간이라고 생각해. 북적이는 공간에서는 돌볼 수 없었던 나의 감정을 기계부품 분해하듯 하나하나 펼쳐 놓고 고장 난 곳은 없나, 녹슨 곳은 없나 들여다보는 거지. 그렇게 한참을 나와 마주하고 나면 다시 일상을 살아갈 힘이 생겨. 휴대전화도 장시간 전원을 끄지 않은 채 사용하면 발열되잖아. 사람도 가끔 리부팅의 순간의 통해 차분히 스스로를 가라 앉혀야 하지.


누구에게도 침범당하지 않는 혼자라는 자유가 이토록 소중한 것인지 너를 낳기 전까지는 몰랐어. 아이들을 원래 좋아했으니 내 아이도 잘 키울 수 있을 거라 착각했지. 너는 이런 말이 서운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이건 너를 사랑하는 마음과 전혀 별개의 문제야. 내가 선택한 삶이니 모든 부정적인 감정과 고행을 달게 삼켜야 한다는 건 정말이지 폭력이야. 엄마라는 존재에 환상만을 불어넣고 싶지 않아. 그건 거짓말이니까. 속으로만 꾹꾹 눌러 담다 난데없이 주변 사람들을 탓하며 원망을 폭발시키고 싶지 않아. 힘든 건 힘든 대로 받아들이고 내가 할 수 있는 한에서 최선을 다 하고 싶어. 이런 다짐을 혼자 하는 거야. 조용히 스스로를 다독이고 힘든 시간들 속에도 나를 살게 하는 사랑의 순간들에 입을 맞추며. 상쾌하게 마음속 묵은 때를 벗고 조심조심 네 방에 들어가 이마에 입을 맞춘다는 사실을 넌 아니?




이런 나의 마음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게 도리스 레싱의 소설을 추천할게. 도리스 레싱은 영국을 대표하는 작가야. 전쟁의 후유증을 비롯해 결혼제도와 모성 또는 가정 안에 일어나는 문제와 정치적 사상이나 계급의 문제를 뛰어난 솜씨로 포착한 작가이지. 그녀의 책을 보고 있으면 특히 여성들이 겪는 문제에 대해 잘 이해할 수 있어. 이 작가의 책에는 중년 여성들이 자주 등장해. 그 나이 여성들에게 부여된 사회적 요구를 충실히 수행하면서도 절대 포기할 수 없는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 발버둥 치는 인물들을 자주 만날 수 있어. 싸우고 화를 내고 때로는 억눌린 욕망을 터뜨리기도 하지만 작가는 무엇보다 그 속에서도 여성 간의 연대를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눈 여겨 볼만한 지점이 많아. 훌륭한 작품들 중에서도 내가 너에게 건넬 책의 제목은 ⌜19호실로 가다⌟야. 소설집이지. 11편의 단편이 실려 있어. 다채로운 내용들 사이에서도 여성의 문제라는 큰 주제를 관통하지. 나는 그중 표제작인 ‘19호실로 가다’를 제일 좋아해.


이 소설은 결혼이라는 제도 안에서 전업주부로서의 삶을 충실히 살고 있는 수잔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어. 한때는 남편만큼이나 일에서 큰 성과를 내기도 했었지. 꿀리지 않을 만큼 교육도 받았지만 그건 과거의 일일뿐. 남편과 네 명의 아이를 건사하는 와중에 그저 자기만의 공간 하나만 있으면 충분하다 여기지. 그래서 아이들이 학교에 가고 남편이 출근한 낮에 어느 허름한 호텔 19실로 가. 19호실의 문을 여는 순간 그녀 어깨 위에 놓인 모든 짐들이 가뿐히 사라지지. 엄마도 아내도 며느리도 아닌 ‘수잔’이라는 본연의 모습 그대로로 돌아가는 시간. 그녀는 딱히 무슨 일을 하지 않아. 그저 그곳에 머물며 가만히 앉아 있어. 어느 날 수전의 남편이 그녀가 호텔을 드나든다는 사실을 알게 돼. 한낮의 호텔이라 하면 떠오르는 불순한 상상들. 남편은 수잔이 다른 남자를 만나고 있다고 생각해. 수잔은 아무런 변명도 없이 그 오해가 사실이라는 듯 굴지. 누구보다 수전이 잘 알았겠지. 삶에 지쳐 그저 그런 호텔에 나만의 공간을 만들었다는 말이 불륜보다 더 받아들일 수 없는 남편이라는 것을. 결국 참다못한 남편은 그녀의 뒤를 밟아 19호실의 문을 열어젖혀. 그 갑작스러운 방문은 그녀 공간에 대한 죽음을 의미하지. 그녀에게 있어 유일한 사생활이자 자기만의 영역이 침범당하자 그녀는 19호실에서 생을 마감해. 남편이 선을 넘은 건 그녀의 공간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녀 자신이기도 했지. 죽어 있는 삶보다 더 생생한 죽음. 마지막 부분이 한없이 안타까우면서도 수전의 선택을 이해할 수 있었어. 남편에게마저 이해받을 수 없는, 가족 안의 고독감이란. 19호실마저 침범당한 지금, 더 이상 그 고독 안에 머물 자신이 없었을 거야.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 너는 아마 막 어린이집에 입학했을 거야. 그때 나도 누구보다도 간절하게 나만의 19호실이 필요한 시절이었지. 아직 작은 너를 기관에 맡긴다는 게 어쩐지 죄책감이 들기도 했어. 그렇다고 네가 없는 시간 동안 유유자적 즐기기만 하는 것도 아닌데. 네가 아침에 울기라도 하면 온종일 마음이 좋지 않았어.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간절히 혼자 있는 시간을 바랐지. 식어 버린 커피와 퉁퉁 불은 라면이 물리기 시작했고 머릿속을 가득 메우는 이야기를 글로 써가고 싶었고 틀어진 고관절에게 휴식을 선물하고 싶었으니까. 네가 어린이집에 간 시간 동안 나는 생애 가장 빠른 동작들로 내 욕망을 위해 손을 놀렸지. 하지만 언제나 바로 옆엔 휴대전화. 혹여라도 네게 문제가 생기면 바로 달려 나가야 하니까. 반은 내 시간에 집중하면서도 나머지 반은 옆에 없는 너를 생각했어. 온전히 나에게만 집중할 수 있는 곳은 어디일까.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에겐 19호실이 존재하지 않았고 대신 시간을 적절히 활용하는 능력을 터득했지. 이제 커버린 너에게서 나의 시간을 배려받을 때면 그렇게나 감격스러울 수가 없어.


‘낭만적인 결혼’의 결과가 가져다준 그녀의 가정. 다복한 아이들과 건실한 남편. 그럼에도 그녀는 누구보다 외로웠을 거야. 자신이 누렸던 성취와 일하는 보람은 이제 가닿을 수 없는 세계의 것처럼 느껴지니까. 아이들이 모두 학교에 가면 달라질 거라는 기대로 10년을 버텼지만 기대와는 전혀 달랐지. 다락에 방을 마련했지만 ‘엄마’라는 명령어에 소환당하기 일쑤, 닫힌 문을 힘껏 밀어젖히고 그녀 품에 달려드는 아이들. 집안에서 수잔은 결코 자유롭지 않았고 진짜 자기 자신을 찾을 수도 없었지. 함부로 드나들 수 있는 공간에서 우리는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을까? 불안한 자유는 평온한 속박만큼이나 사람을 미치게 만들지. 그녀는 19호실에 가서야 자신의 허락 없이는 그 누구도 들어올 수 없는 안전지대를 찾았던 거지. 가끔 사람들은 엄마의 마음 안에 사랑의 화수분이 달린 듯 무한정 애정을 퍼줄 거라 기대하는 것 같아. 모성이라는 말이 어쩔 땐 끔찍한 감옥처럼 느껴져. 채움의 시간 없이 소진되기만 하던 그녀는 결국 막다른 골목에서 그릇된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거야. 코끝이 찡해지더라.


소설집 속의 다른 소설인 ‘남자와 남자 사이’와 ‘최종 후보 명단’에서도 여성에게 그들만의 공간이 필요하다는 말을 하고 있어. 여기엔 공간을 가지지 못한 여성들의 이야기를 담아 결혼과 가정, 가부장적 시선 아래 대상으로서만 존재하는 여자들의 현실을 극명하게 전하지. 역할을 부여받고 이름을 잃은 여성들은 또 다른 여성과의 우정 혹은 연대로 위기를 극복하거나 서로를 위로해. 공통된 고난 속에 맞잡은 손들이 어찌나 강력한지 연대할 수 있는 상대가 있다는 건 정말 축복받은 일이라고 생각해. 단 한 사람이라도 나를 이해해주면 세상은 살 만하지. 네가 엄마에게 그런 존재가 되어주겠어?



지금 나의 삶은 오로지 나의 선택에 의해 이루어졌어. 그래서 나는 자주 입을 다물게 돼. 힘들다는 말이 무책임하게 느껴져서. 혼잣말로 구시렁거리다 문득 나 자신이 한심스러워지는 날도 있어. 군중 없이도 자기 검열을 하게 되는 건 혹여라도 내 기분이 너에 대한 나의 마음이라 오해할까 봐 걱정이 되기 때문이야. 나의 기분이 너를 향한 태도가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 하고 있어. 그러기 위해서 엄마는 아무도 모르게 엄마만의 시간을 가져. 쉼이 필요해, 누구나. 너도 학교 마치고 내내 숙제만 하다 잠들면 너무 힘들 거 같지 않아? 쌔근쌔근 네가 코 골며 달콤한 잠에 빠져 있을 때, 엄마는 홀로 한낮에 가쁘게 몰아쉰 숨을 고르고 있어. 그러니 가끔 잠에서 깨어나더라도 모른 척해줘. 엄마가 이불 덮어쓰고 게임하는 널 가끔 모르는 척해주는 것처럼.




From. 새벽에 홀로 버터구이 오징어를 만들어 먹는 엄마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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