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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애하는 사장님께

by 존치즈버거


친애하는 사장님께,


안녕하세요, 사장님. 저는 얼마 전까지 사장님의 회사인 제황 식품에 근무했던 황세영 주임의 딸인 진은호입니다. 사장님이 엄마를 통해 제 걱정을 그토록 하셨으니 아마 저를 당연히 알고 계실 거라 생각해요.


제가 사장님에게 편지를 쓰는 이유를 말씀드려야겠네요. 사실 이 부분은 쓸까 말까 고민이 많았어요. 왜냐하면 제가 엄마의 핸드폰을 몰래 봤기 때문입니다. 우리 엄마는 모든 사람은 존중받아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분이거든요. 그래서 다른 집 애들은 엄마가 자기들 일기장을 몰래 본다고 암호까지 쓰는데 저는 그럴 필요가 없답니다. 저의 ‘사생활’을 존중해주는 엄마시거든요. 하지만 저는 그러지 못했어요. 엄마가 사장님께 받은 메시지를 보며 자주 혼자 불 꺼진 거실에서 욕을 하거든요. 전 아주 충격을 받았어요. 그래서 엄마가 잠든 밤에 몰래 엄마의 휴대폰을 보았어요. 비밀 지켜주실 거죠?


황주임. 그동안 정들었던 회사를 떠나는 게 쉽지 않았겠지. 황주임이 뭔가 오해를 한 모양인데, 나는 다 황주임을 위해서 그랬어. 듣자 하니 황주임 남편도 탄탄한 대기업에 근무하고 시댁도 서울 강남에 있다면서? 형편 되는 사람이 굳이 아등바등 살 필요가 있나? 자기 딸도 이제 초등학교 5학년 올라가지 않아? 요즘은 초등학생 때부터 공부를 세게 시켜야 서울대 간다는데 그거 다 누가 관리해? 엄마 아니야? 애 옆에는 엄마가 있어야 된다 이 말이야. 엄마가 집에 없으면 어디 가서 사 먹기 밖에 더 하겠어? 이젠 집에서 밥도 하고 살림도 하고 엄마로 충분히 살라고 내가 다 생각해서 그런 거야.


우선 이 부분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어요.


첫째! 저는 서울대를 갈 생각이 없어요. 간다면야 물론 좋겠죠. 하지만 벌써부터 대학만 바라보고 살기는 싫어요. 엄마도 한 번도 서울대에 가라고 한 적이 없답니다. 행복한 사람이 되라고만 하죠. 어른이 되어서 서울대를 가면 행복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노는 게 제일 좋은 어린이예요. 아직 저는 그렇게 먼 미래까지 내다볼 시간이 없어요. 세상에 재미있는 게 얼마나 많은데요?


둘째! 정말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인데……. 아빠가 대기업에 다니는 거랑 우리 할머니 댁이 강남에 있는 거랑 엄마가 일 그만두는 게 무슨 상관이 있죠? 이 부분은 정말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요. 형편이 되면 왜 일을 하면 안 되죠? 엄마도 저를 낳기 전에는 대기업에 다녔지만 아빠도 계속 일을 했거든요. 만약 엄마가 계속 그 회사에 다녔다면 아빠가 일을 그만두어야 했다는 건가요? 그런 건 가위 바위 보 같은 걸로 정하는 건가요? 인터넷 지식인에 검색하고 싶었는데 도무지 어떤 키워드를 쳐야 할지 몰라서 못 찾아봤어요.


셋째! 이건 정말 우리 엄마가 아니라 사장님이 오해를 하신 것 같아요. 물론 저도 엄마가 같이 있으면 ‘참’ 좋지만요. 저도 가끔은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답니다. 엄마가 일 그만두신 얼마 동안은 거실에 있는 엄마와 마주치면 놀라서 소리를 지르기 일쑤였어요. “엄마가 왜 여기 있어?” 그럼 엄마는 시무룩한 얼굴로 “그러게 말이야.”라고 말씀하셨답니다. 거실에서 서성거리는 엄마가 신경 쓰여서 제 방에서도 자꾸 거실을 보게 된답니다. 어차피 일요일엔 하루 종일 엄마랑 보낼 수 있는데 평일까지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저도 손이 있고 발이 있고 생각이란 게 있어서 제 할 일은 척척하는 걸요.


아, 참참! 살림이라면 집안일을 가리키는 거죠? 저희 집에는 엄마, 아빠, 저 셋이 살고 집에 있는 세 사람 모두 집의 주인이니 살림은 다 같이 하는 거 아닌가요? 엄마는 그냥 존재만으로도 충분히 엄마인데 살림을 하면서 ‘충분히 엄마로 살라.’는 말은 좀 이상한 말인 거 같아요. 게다가 우리 엄마 요리 못해서 같이 있어도 사 먹어요. 요리는 아빠가 더 잘하는 걸요.


세상이 변해서 여자가 임원도 하고 사장도 한다지만, 나도 가정을 건사하는 입장에서 애엄마가 나와서 일하고 그러면 애 정서에 안 좋다고 생각해. 뉴스에도 나오잖아, 사고 치는 애들. 그게 다 엄마 보살핌 못 받아서 그래.


‘정서’라는 단어를 제대로 알기 위해 사전을 찾아보았어요. 여러 가지 뜻이 있더라고요. 아무래도 사장님은 그중에서 ‘사람의 마음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감정. 또는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기분이나 분위기.’를 말하고 싶으셨던 거겠죠? 저 뜻도 잘 와닿지는 않지만 어쨌거나 ‘기분이나 분위기’라는 말을 하고 싶으셨던 것 같네요. 죄송한 말씀이지만 사장님의 말씀은 틀렸어요! 이건 정말 확실히 말할 수 있어요. 오히려 우리 집 정서는 엄마가 회사를 그만둔 뒤에 조금 나빠졌어요. 저녁이 되면 지치긴 해도 언제나 뿌듯한 표정으로 하루 마무리를 하시던 엄마는 이제 거의 표정 없이 한숨을 쉬거나 가만히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이 더 많답니다. 가끔 혼잣말을 하시기도 하는데 아무래도 이건 사장님에 대한 욕이라 여기에는 적지 못하겠네요. 그런 모습을 보면 혼나지도 않았는데 심장에 무거운 추가 떨어진 거처럼 무겁고 주눅이 들어요. 저는 이게 오히려 제 ‘정서’에 안 좋은 거 같은 걸요?


음, 그리고 이건 정말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은데요. 엄마가 옆에 없다고 아이들이 모두 ‘정서’가 안 좋아지는 건 아니랍니다. 이건 친구의 사생활이라 정확하게 이름은 말할 수 없지만, 우리 학교에는 엄마랑만 살거나 아빠랑만 살거나 아니면 부모님 모두 안 계신 친구들도 있지만 그 아이들이 모두 기분이 좋지 않거나 뉴스에 나올 만큼 나쁜 짓을 하는 것도 아니거든요. 물론 아주 가끔 엄마나 아빠가 그립다는 말을 하긴 하지만 그 친구들이 말을 하지 않으면 우리는 모두 똑같아요! 얼마 전, 학교에서 차별에 대해 배울 때도 선생님이 그러셨거든요. 한쪽면만 보고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고요. ‘얘는 그럴 거야.’,라고 말하는 걸 어려운 단어로 ‘단정’이라고 하고 그런 생각이 돌처럼 굳어서 우리 마음속에 박히면 ‘편견’이라고 말씀하셨어요. 혹시라도 사장님이 다른 곳에서 실수하시면 안 되니까 말씀드립니다.


황주임, 저번에 딸아이 아플 때도 말이야 퇴근시간 되자마자 쌩하고 나갔잖아. 솔직히 그때 좀 그랬어. 최 과장은 그날 12시까지 남아서 서류 작업했는데. 황주임은 회식도 자주 빠지지 않나? 직원들 사기 진작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해. 나는 말이야, 가족 같은 회사를 원하거든. 정말 회사가 나의 모든 것이라고 생각하고 일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이 말이야!


저도 기억이 나요. 제가 독감에 걸려 엄청나게 고생을 했으니 기억이 안 날수가 없죠. 그날 할머니가 오셔서 저를 보살펴 주셨어요. 엄마는 저녁에 오셨는데 일을 다 하고 퇴근 시간에 맞춰 오신 걸로 기억해요. 평소보다 이르긴 했지만 그때는 분명히 퇴근 시간 이후가 맞는데. 왜 사장님은 솔직히 좀 그랬을 까요? 그리고 그날 엄마도 저를 보살피면서 남은 업무를 집에서 처리하셨답니다.


분명해요. 제가 노트북을 들고 있는 엄마에게 “뭐 하고 있어?”라고 물어보았거든요. 저희 아빠도 가끔 야근을 하시거나 집에 자료들을 들고 와 늦게까지 컴퓨터를 하시는 날도 있어요. 하지만 제가 알기로 아빠에게 집으로 일을 가져간다고 뭐라고 하는 사람은 없어요. 저도 가끔 숙제가 많은 날에는 밤늦게까지 잠들지 못하고 책상 앞에 앉아있긴 하지만 어쨌든 집에서 나머지 숙제를 해요. 만약에 숙제가 끝날 때까지 학교에 남으면 선생님이랑 부모님께 더 혼이 날지 몰라요. 왜냐하면 너무 늦게 돌아다니면 위험하니까요. 뉴스를 좋아하는 사장님도 아시겠죠? 밤늦은 거리에서 피해를 당한 사람들은 대부분이 여자나 여자 노인 아니면 여자 아이랍니다. 우리 엄마가 어른이긴 하지만 여자잖아요. 사장님도 사장님 직원이 위험한 건 원하지 않으실 거 같은데…….


아무튼 이건 제가 잘못한 거 같네요. 엄마가 목도리를 하고 나가라고 말씀하셨는데 갑갑하다고 안 하고 나갔거든요. 제가 아파서 엄마를 난처하게 만들었네요. 하지만 사장님! 저는 정말 궁금증이 들어요. 사장님은 가족 같은 회사를 원하신다고 말씀하시면서 왜 회식에 참여 안 하는 걸 나쁘게 보실까요? ‘사기진작’이라는 말이 뭔지 몰라서 또 사전을 찾아보았답니다. ‘의욕이나 자신감이 충만하여 굽힐 줄 모르는 씩씩한 기세를 떨쳐 일으킴.’이라는 뜻이지요? 사실 저는 이 말도 이해가 잘 되지 않아서 지식인을 보았더니 어떤 분이 친절하게 ‘일 잘하라고 기운을 북돋아 주는 것’을 말한다고 설명을 해놓았더라고요. 저는 이 문장을 읽고 한참 생각에 빠졌답니다. 회식에 다녀온 엄마는 항상 술냄새가 나고 술을 마신 탓인지 다음 날이면 아이고 머리야, 하고 신음 소리 같은 혼잣말을 하셨는데 이게 정말 사기진작이 되는 일인지 모르겠어요. 저희 친척들도 가끔 다 같이 모여 밥을 먹거든요. 그때 누가 술을 많이 마시면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걱정을 하신답니다. 그리고 시간이 너무 늦으면 아이들 재워야 하니 이제 일어서라고 재촉을 하시는데, 엄마의 회식은 정반대거든요. 제가 전화를 걸면 “먼저 자고 있어. 엄마가 금방 갈게.”라고 말씀하시면서 엄청 미안해하시거든요. 정말 가족 같은 회사가 되려면 직원들과 회식을 하기보다 빨리 돌려보내는 게 맞지 않나요? 애 옆에는 엄마가 있어야 한다고 계속 말씀하셨는데 왜 회식은 사장님이 원하는 만큼 오래 하는 건지 알 수 없네요. 꼭 대답해 주세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말도 하고 싶어요. 엄마는 항상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세요. “엄마는 은호도 정말 사랑하지만 그만큼 엄마의 삶도 사랑해. 엄마가 바빠서 은호가 서운한 점이 있겠지? 하지만 은호도 크면 알게 될 거야. 사람에게는 각자의 개성에 따라 각자에게 맞는 삶의 방식이 있다는 걸. 엄마는 일 하면서 행복을 느껴. 하지만 엄마가 일해서 은호가 참을 수 없이 불행하다면 일을 그만둘게. 엄마는 은호의 응원을 받으면서 일하는 게 제일 좋거든.” 저는 엄마에게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어요. 엄마가 바빠서 학부모 참여 행사에 빠지시거나 아침에 먼저 나가시는 일이 있기는 하지만 그런 날에는 아빠가 대신 그 자리를 채워주시니까 서운할 것이 없고, 엄마가 없어서 집이 조금 난장판이 되는 날도 있지만 대신 저 스스로 청소하는 법을 배울 수 있으니 나쁠 것도 없다고요. 이렇게 서운한 점을 하나하나 짚어보았더니 모두 다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어요. 행복한 엄마의 얼굴을 보는 것만큼 기쁜 일이 세상에 또 어디 있겠어요? 엄마도 제가 방탄소년단 좋아하는 걸 인정해주시는데, 엄마가 행복을 느끼는 ‘일’에 반대를 할 이유가 없다고요. 저도 엄마를 사랑하지만 가끔은 엄마보다 방탄소년단을 생각하는 일이 더 많거든요. 엄마는 일할 때 엄청 행복한 사람인데 이 정도면 회사를 나의 모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 딱 맞지 않나요?


그러니 황주임아! 좋게 말할 때 우리 깔끔하게 작별인사를 하자. 그동안 수고 많았고 내가 섭섭하지 않게 이거 저거 챙겨 줄 거야. 그러니 부당해고니 뭐니 소란 피우지 말아 줬으면 좋겠어. 나 때는 말이야 사장 말이 곧 법이었다고. 아무튼 잘 이해한 걸로 생각하겠네.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국민이 주인인데 어떻게 사장님 말씀이 법이 될 수 있죠? 사장님이 누군가에게 속으신 것 같아요. 그리고 ‘사장님 때’는 언제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지금은 사장님 때가 아니라는 말씀인가요?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한 건데 사장님의 ‘나 때’가 따로 있었다면 지금 사장님의 시간은 다른 분이 주인이시라는 말이죠?


아무튼! 엄마는 항상 모든 일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으니 누군가 화를 내면 같이 화를 내기 전에 먼저 상대방의 말을 들어보라고 하셨어요. 엄마가 소란을 피우신다면 소란을 피울만한 이유가 있는 게 아닐까요? 그러니 사장님도 같이 화내시지 말고 엄마의 말을 한 번쯤은 잘 들어주셨으면 좋겠어요. 사장님의 말씀처럼 좋게 말할 때 깔끔하게 작별인사를 하는 게 좋잖아요. 저희 엄마가 평소에는 천사지만 화가 나면 어떻게 변할지 모르거든요. 아무튼 저도 사장님이 이해한 걸로 생각하고 편지를 마치겠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멋진 엄마이자 일 잘하는 황세영의 딸, 진은호 올림


P.S. - 얼굴도 뵌 적 없지만 제 걱정 많이 해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 전 무럭무럭 잘 자라고 있으니 이젠 걱정 안 하셔도 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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