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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의 바람

by 존치즈버거


“나 바람 폈어.”


“이제 하다 하다 별 헛소리를 다 한다.”


“진짜야.”


“이 상황에 농담이 나와? 당신이 퍽이나 그랬겠다. 집에 오면 침대에 누워 꼼짝도 않는 사람이 무슨 바람이야? 바람은 아무나 피워? 그게 얼마나 성실하고 꼼꼼해야 되는데!”


“농담하는 거 아니다. 진짜야.”


"여자의 직감이 얼마나 무서운데. 바람피우면 딱 알지, 내가 왜 몰라? 당신 바람 안 폈어. 내가 알아."


"빛나 고3이라고 네가 나한테 관심이나 줬니? 바로 옆에서 난리부르스를 지겨도 콧방귀도 안 뀌었으면서. 네가 뭘 알아."


“하, 그래? 그렇다고 치고. 그래서 뭐? 이혼이라도 하자고?”


“아니야. 이젠 다 끝났어.”


“그-으-래? 그럼 지금 왜 말하는데? 상식적으로 말이 돼?”


여자가 쏘아붙이듯 말했다. 그리고는 특유의 콧소리를 내며 팔짱을 꼈다. 남자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여자도 남자를 보았다. 내리까는 눈빛, 왜? 뭐? 지금 이 상황에 터진 입이라고 막 씨부리니?라고 말하는 듯한 그 눈빛. 남자의 뒷목이 뜨거워졌다. 남자는 참을 수 없었다.


“관심이 있다고! 나도 우리 가정에 관심이 있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거야. 너랑 빛나 둘 다 소중하게 생각한다고. 죄책감 안 들었던 것도 아니야. 어떤 때는 그냥 다 버리고 도망가고 싶더라. 어차피 이 집에서 내가 돈 벌어다 주는 기계밖에 더 해? 오랜만에 가슴 뛰더라. 매일 애 꽁무니만 쫓아다닌다고 내가 아침을 얻어먹었니, 저녁을 제대로 얻어먹었니. 간만에 가족끼리 뭉쳐 보려고 하면 그저 공부, 공부하면서 괜한 소리 하지 말라고 핀잔이나 줬지. 애도 너한테 세뇌돼서 아빠 보기를 우습게 보고. 그 여자는 달랐어. 나를 나 자체로 인정해주고 사랑해줬어. 자기랑 어디 외국 나가서 살자고 하는 거 솔직히 엄청 흔들렸는데 다 포기했다. 깨끗하게. 너랑 빛나 그래도 내 가족이고 내 사람이잖아. 내가 너네들 때문에 무얼 희생했는지 알아라 이 말이야!”


여자는 한 손을 허리에 짚고 한 손은 이마에 짚은 채로 남자를 쏘아보았다. 여자가 극적으로 흥분했을 때 취하는 자세였다. 가령, 남자가 이번 명절에는 부모님댁에서 몇 밤 자자고 제안했을 때 여자가 보이는 리액션 중 하나.


“그래서 누군데? 어느 여자가 미쳤다고 너랑 도망가서 살자 하대?”


“김예빈.”


“김예빈이 누군데?”


“쓰리고의 여왕, 김예빈.”


“……뭐?”


여자가 잠시 숨을 고르다 소파 위에 털썩 앉았다. 여자가 한동안 말이 없자 남자도 그제야 흥분이 가라앉으며 죄책감이 밀려왔다. <쓰리고의 여왕>은 지상파 드라마 30%라는 쾌거를 이루며 다양한 시청자들을 티브이 앞으로 모여들게 만든 작품이었다. 아내도 그중 하나였다. 아내는 김예빈의 피부와 가느다란 손가락 마디마디에 찬사를 보냈다. 김예빈을 만나고 집으로 돌아와 김예빈이 광고하는 화장품을 바르는 아내를 볼 때면 남자는 가끔 자신이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처럼 의기양양해지기도 했었다. 이제 다 끝났다. 다 끝냈다. 이런 식으로 급작스럽게 고백하고 싶진 않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커다란 쿠션이 남자의 얼굴 정면을 가격했다. 남자는 살짝 뒷걸음질 쳤다.








남자가 여자에게 폭탄고백을 하게 된 발단은 외동딸 빛나가 리더십 캠프를 떠나면서였다. 명문대 수시 입학에 성공했으면서도 입학 전 시간을 허투루 쓰고 싶지 않다며 거금을 들여 하와이로 갔다. 가벼운 소아마비를 앓고 있는 탓에 평소 걱정이 많은 아내도 아이의 성과를 치하하는 마음으로 기분 좋게 캠프를 수락했다. 오랜만에 부부 둘만 남은 집에는 적막만이 자리했지만 아내는 자주 미소 짓고 그와 눈이 마주쳐도 으르렁 대지 않았다. 남자는 이때가 적기다 싶었다.


오랜 감정의 골을 메우는 방어책으로 남자는 여자가 연애 시절 즐겨 들리던 노포에 들러 곰장어와 불족발, 소주를 사 가지고 집으로 왔다. 소주 몇 잔에 어색함이 사라지자 남자가 슬쩍 아내의 가슴께에 손을 올렸다. 여자가 주춤하며 남자의 손을 뿌리치며 웃었다. 남자는 이번에 겨울잠에서 막 일어난 곰처럼 몸을 웅숭그리고 여자의 상체를 껴안았다. 가만있던 여자가 그의 머리칼이 간지럽다며 다시 한번 밀쳤다. 남자는 모처럼 연애 때 얼굴로 새침하게 튕기는 여자가 귀여워 그 시절처럼 여자를 간지럽혔다. 몸을 베베 꼬며 깔깔 웃던 여자가 발로 그의 복부를 가격했다. 남자가 욱하고 몸이 밀려났다.


“왜 맨날 선을 넘어? 좀 적당히 해.”


무드를 위한 남자의 노력은 금방 실랑이로 이어졌다. 여자는 하여간 정도를 모른다며 남자를 나무랐다. 평소 모녀에게 자주 듣던 질타였다. 술기운이 남자를 북돋았다. 남자는 발끈했다. 빛나가 있었다면 그쯤에서 마무리될 다툼이었건만 아내는 딸이 없는 틈을 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남자도 질 수 없었다. 두런두런 대화나 나누자던 남자의 바람은 순식간에 휘발됐다. 분노로 이글거리며 두 사람은 그간 서운한 감정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싸움이라는 것도 주거니 받거니 가는 것만큼 오는 것이 있어야 하는데 두 사람은 벽치기 하듯 서로의 말만 내뱉었다. 여자는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가정 대소사를 모두 그녀에게 전가하는 남자가 서운했고, 남자는 입만 열면 빛나 이야기 그도 아니면 빛나에게 들어가는 돈 이야기만 하는 여자가 진저리 났다. 아래층 노부부의 민원이 있고 나서야 두 사람의 싸움은 마무리되었다.


다음 날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빛나가 보낸 사진을 보며 생글생글 미소 짓는 아내를 보자 남자는 부화가 치밀어 올랐다.


‘저 여자는 내가 안중에도 없지.’


남자는 여자가 끓여준 콩나물국을 보란 듯이 개수대에 버리며 여자를 쏘아보았다. 여자가 애써 그런 그를 무시하는 와중에도 남자는 분주하게 집안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구시렁거렸다. 참다못한 아내가 폭발하며 둘은 다시 싸움이 붙었다. 급기야 여자의 분노가 정신머리 못 차리고 여전히 가부장적인 꼰대의 태도를 유지하려는 이 시대의 중년 아저씨들에 이르자 남자가 그만 자신의 비밀을 말하고 만 것이다.








“쓰리고 김예빈? 당신 지금 여배우 김예빈 말하는 거야?”


“그래, 네가 제일 좋아하는 드라마, 거기 주인공 김예빈.”


남자가 벌게진 볼을 매만지며 답했다. 여자의 어깨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엑소시스트의 악귀 들린 소녀마냥 몸을 뒤로 젖히며 웃기 시작했다.


“아, 진짜 웃으면 안 되는데. 이런 상황에서 내가 웃으면 안 되는데.”


여자는 미치광이처럼 웃으며 자신이 여전히 화가 가라앉지 않았음을 증명하려는 듯 그를 째려보다 눈이 마주치면 다시 웃기를 반복했다. 남자는 여자가 갑작스러운 고백에 충격을 받은 것이 아닌가 걱정되었다.


“당신 진짜 왜 그러는데? 뭐가 문젠데? 왜 이러는 건데? 어이가 없어서 말이 안 나오네.”


“난 그냥 당신한테 솔직하고 싶었으니까.”


“미치겠네, 진짜. 이제 좀 그만해. 아니 차라리 얼마 전에 이혼한 자기 동창 이영아나 자기 회사에 최대리라고 말하지 그랬어. 그랬음 나도 깜빡 속아 넘어갔겠다. 뭐? 김예빈? 쓰리고의 여왕 김예빈? 꽃미남 유하진이랑 사귀었던 그 김예빈? 김예빈이 약 처먹지 않은 이상 당신이랑 왜 만나? 걔가 미쳤어? 홍상수 부럽다고 난리 칠 때 알아봤어. 무슨 망상을 해도 유분수지. 홍상수는 상도 받고 알아주는 감독이기라도 하지. 당신이 뭐라고 김예빈이 너를 만나. 장난도 정도껏 해라. 진짜 근래 들었던 헛소리 중에 일품이다, 일품!”


여자는 그렇게 말하고는 머리를 좌우로 세차게 흔들며 부엌으로 갔다. 물 끓는 소리가 났다. 남자는 광야 한가운데 벌거벗고 서 있는 사람처럼 수치심에 고개를 떨궜다. 아내는 상처받지 않았다. 아내는 아무렇지 않았다. 다만 화가 났다. 무엇보다 아내는 믿지 않는다. 그 사실이 남자를 미치도록 괴롭게 만들었다.



남자는 쉬이 잠에 들지 못했다. 자주 뒤척였고 꿈은 꾸지만 정신은 생생했다. 그토록 그리워하면서도 김예빈은 꿈에서조차 마주치지 않았다. 남자는 일어나 거실로 갔다. 우두커니 소파에 앉아 바깥을 바라보다가 소리를 지르는 대신 화장실로 갔다. 물을 틀고 울었다. 마음을 다잡듯 찬물로 세수를 하고 나오니 아내가 서 있었다. 남자는 고개를 숙이고 여자를 지나쳐 가기로 했다. 아내가 그의 팔을 잡았다. 남자가 뿌리쳤다.


“도대체 왜 그러는 건데?”


“됐어. 말을 말자.”


“무슨 말을 말아. 그럴 거면 시작을 말았어야지.”


“그래, 다 내 잘못이다. 내가 쓰레기다.”


“또 그런 식으로 퉁친다. 혹시 진급 미끄러진 것 때문에 그래?”


“그런 게 아니야.”


“그럼 뭐?”


“왜 안 믿는데?”


“……. 설마 아직도 그 이야기야? 미치겠다. 당신 진짜 어디 아픈 거 아니야? 그만해라 좀.”


“용서를 받고 싶어. 제대로 된 용서를 받으려면 제대로 된 사실이 있어야 해.”


“자다가 봉창을 두드려도 이거 보단 낫겠다.”


“이런 식이야, 너는 늘 이런 식이었어, 나한테.”


“휴, 그래. 그게 정말 사실이라면 증거를 보여줘. 그럼 내가 믿는 시늉이라도 해볼게.”


“증거?”


“당신이 정말 김예빈이랑 바람이 났다는 증거. 그렇게 사랑했다매. 그럼 같이 찍은 사진 한 장이라도 있을 거 아니야.”


남자는 헛웃음이 나왔다. 증거가 있을 리가 없었다. 아내의 말마따나 미치도록 사랑했으니까. 김예빈은 모두에게 우상이었지만 남자에게 김예빈은 그저 배우라는 직업을 가진 한 여자에 불과했다. 서점에서 우연히 마주치고 김예빈이 자신의 바지에 커피를 쏟았고 어쩔 줄 몰라하는 자신을 무턱대고 집으로 데리고 가 넉넉한 사이즈의 자기 옷을 빌려주고 그 사이 세탁을 하고 그러다 이야기를 나누고 다시 만날 약속을 정하고. 말도 안 되는 로맨스 영화 속 한 장면이라고 생각했던 일이 자기 자신에게 벌어졌을 때만 해도 남자는 자신이 겪는 일이 무엇인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그냥 사랑이죠, 뭐.’ 만남이 이어지고 김예빈이 집으로 돌아가려는 남자를 뒤에서 끌어안으며 가지 말라고 울었을 때 “뭐하시는 거예요?”하고 묻는 남자의 말에 김예빈은 이렇게 말했다. 이런 게 사랑이구나, 남자는 그렇게 사랑에 빠졌고, 빠진 김에 도망가고 싶었고, 도망가자 생각하니 죄책감이 밀려왔다.


‘난 늘 이용만 당하는 것 같아.’


김예빈은 대중이 알지 못하는 비밀과 속내를 남자에게 자주 털어놓곤 했었다. 그간의 인간관계가 어떠했었는지, 자기 안에 어떤 두려움이 자꾸만 스스로를 못살게 구는지. 남자는 주의 깊게 김예빈의 말을 경청했다. 사진은 찍지 않았고 대화를 나눠도 용무가 마치면 깡그리 지웠다. 대신 둘이 마주 볼 때면 이 순간이 다 인 듯 서로를 서로의 눈에 담았다. 말없이 내내 서로를 마주 보고 쓰다듬으며.


“없어. 그런 거.”


“없다고?”


“그래. 사진도 대화 기록도 아무것도 없어.”


“그래 놓고 나보고 믿으라고?”


남자는 헛웃음이 나왔다. 자신을 향한 사랑이 아닌 바람의 증거를 대라는 아내의 말이 어이가 없었다. 나 자신이 증거인데 도대체 더 어떤 증거를 내놓아야 하는 건지.








“빛나 아빠야. 그러지 말고 속 시원하게 이야기를 좀 해봐라. 이상한 소리 좀 그만하고.”


참다못해 아내가 남자의 어머니에게 SOS를 쳤다. 똥으로 메주를 쑨대도 믿어주던 엄마임에도, 그가 김예빈과 바람을 피웠다는 소리에는 차마 넓은 아량을 보이지 못했다.


“이야기했잖아요. 그게 다라고. 그래서 솔직하게 털어놓고 용서 받고 싶다고. 내가 바라는 건 딱 그거 하나라고.”


남자는 역정을 부렸다. 다 큰 어른이 부부 사이의 일을 부모에게 일러바쳤다는 경솔함에 이미 화가 난 남자였다. 그런데 누구보다 자신을 믿어주는 엄마마저 그가 어딘가 나사 하나 빠진 사람처럼 굴고 있다 대하는 모습이 남자를 비참하게 만들었다. 엄마에게 아내를 처음 인사시킨 날 그녀는 남자에게 말했었다. 너 정도면 김희선도 만날 수 있는데 어디서 저런 애를 데리고 왔냐고, 네가 너무 아깝다고.


“빛나 어멈아. 아범 데리고 병원 한 번 가봐라.”


평소 같았다면 이런저런 대소사를 아내에게 닦달했을 엄마였지만, 이번에는 그에게 며칠 째 성화였다. 수화기에 대고 끅끅 우는 엄마를 달래며 그는 마지못해 병원으로 갔다.


“망상이 시작된 시기가 정확히 언제부터였죠?”


의사는 무심히 턱을 괴고 말했다. 남자는 콧방귀를 뀌었다. 아내가 나서 상황을 설명했다. 의사 또한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이런 사람들 많이 보았다는 듯이 무턱대고 호전을 약속했다. 본질적인 문제에 접근해보자는 의사의 말에 아내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놈의 빛나, 빛나, 남자의 귀를 때리는 어여쁜 딸의 이름. 아내는 펑펑 울기 시작했고 남자의 정신을 상담하기 위한 45분의 시간은 급기야 부부상담으로 전환되었다. 의사는 티슈를 건넸다. 잘 버텼다고 아내를 칭찬했다. 아내에게 그토록 많은 슬픔이 있다는 사실이 남자는 믿기지 않았다. 네가 왜? 나는 어쩌고? 상담이 끝나고 그나마 속이 좀 후련해진 것은 아내뿐이었다. 남자는 다시 병원을 찾지 않았다. 다음 약속은 아내 혼자 다녀왔다. 하와이에 간 빛나가 돌아오기까지 이제 딱 1주가 남았다. 아내는 그 안에 모든 걸 해결하고 싶어 했다.








“옷 입어.”


주말에 아내가 자고 있는 그를 깨워 백화점으로 차를 몰았다. 없던 셈 치고 이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려는 건가 남자는 잠시 생각했다. 도착한 곳에는 줄이 길었다. 여자가 그를 잡아당겨 줄을 섰다. 화장품 매장 한 편에 하얀 책상이 놓여 있었고 거기 김예빈이 앉아 있었다. 남자가 몸을 훽 돌렸다. 아내의 악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당신 여기서 그냥 가면 나 소리 지를 거야.”


아내의 눈빛이 선득했다.


“왜? 막상 대면하려니 자신이 없어?”


남자는 아무 말하지 않았다. 이토록 초라한 모습만큼은 그녀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는데. 혹여나 다시 마주친다 해도 그곳이 사인회일 거라는 상상은 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안겨 준 영화의 한 장면처럼, 햇살이 눈부신 어느 오후, 말끔하게 갖춰 입고 서울시립미술관 특별전시회 한 모퉁이에서 조용히 그리고 우아한 조우를 꿈꾸던 그였다. 그는 전신이 발가벗겨진 기분으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아내의 우악스러운 손길이 그의 허리띠를 움켜잡은 채였다.


“다음 분.”


진행요원의 말이 사형선고 같았다.


“반가워요. 김예빈씨. 저 남편이랑 같이 왔어요.”


아내가 우렁차게 말했다.


“아, 네.”


고개를 든 김예빈이 아내와 남자를 번갈아 보았다. 김예빈이 말했다.


“두 분이 참 많이 닮았어요. 보기 좋아요.”


해말갛고 명랑한 미소. 아무것도 거리낄 것 없는 자의 천진함. 나를 사랑해주고 나를 보기 위해 줄을 서 준 당신들에게 무한한 감사를 표할 뿐이라는 그 표정에 남자는 온몸에 피가 빠져나가는 기분을 느꼈다.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모르세요?”


“네?”


“우리 남편 모르시냐구요.”


“죄송하지만 기억이…….”


“정말 본 적 없으세요?”


“글쎄요?”


김예빈이 어깨에 걸쳐진 머리를 뒤로 넘기며 새초롬하게 눈을 치켜떴다. 진행요원이 그들을 주시했다. 사랑 받는 자의 오만함 같은 것이 김예빈의 얼굴을 스칠 때 아내가 손사래를 치며 웃었다.


“제가 괜한 말을 했네요. 오형식이에요. 우리 남편 이름이요. 남편 이름 써주세요.”


“아, 그렇군요.”


김예빈은 시원스레 사인을 했다.


“두 분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김예빈의 커다란 눈망울이 스스럼없이 남자를 향했다.


“다음 분.”


당신과의 이별은 죽음이나 마찬가지라던 김예빈은 누구보다 생생히 살아 그를 마주하고 있었다. 남자는 차마 뒤를 돌아볼 수 없었다. 아내가 몇 걸음 가다 그를 툭 쳤다.


“이거 봐.”


사인 밑에는 크게 '오영식'이라고 쓰여 있었다.








‘다 거짓말 같아요. 어쩔 땐 내 존재 자체도 그냥 거짓말 같아. 남들이 만든 허구. 그런 거 있잖아요. 여기가 사실은 현실이 아니라 게임이나 영화 속 아닐까? 내가 실제로는 사람들이랑 더불어 사는 존재가 아니라 허구의 대상이었던 거고. 한국을 빛낸 배우네, 스타네, 이상형이네 이런저런 수식어 붙여서 다들 내 이야기를 하지만 나는 정작 내가 무엇인지 모르겠거든요. 초라해. 혼자 있으면 더 초라해. 그렇다고 사람들이랑 있을 때 외롭지 않은 것도 아니야. 알죠? 나 혼자 집에 있어도 불 다 켜놓는 거. 조금이라도 어두우면 그냥 내가 사라질 것 같아요. 조명 없는 곳에서 나는 아무것도 아니야. 잠을 자다가도 내가 갑자기 사라질 것 같아서 숨이 턱 막히던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어요. 당신을 만나기 전까지 내가 그랬어. 손 좀 잡아줘. 더 세게. 내가 살아있는지 확인해보게.’


처음으로 김예빈과 온전히 하룻밤을 보내던 날이 이제는 먼 과거의 잔영 같았다. 모든 순간을 기억하기 위해 눈을 부릅뜨고 애썼지만 어쩐지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아른 대던 조명과 얼핏 스치던 감촉, 냄새, 음악과 웃음소리. 으스러진 파편들은 아무리 주워 모아도 완벽한 그날은 완성될 수 없었다. 남자가 기억하려 애쓸수록 기억들은 더 어지러이 자취를 감췄다.


남자는 이제 스스로가 의심스러워졌다. 기억이라는 이름으로 부유하는 모든 말과 순간들이 진짜 자신의 것이었는지. 그 말을 정말 김예빈이 자기에게 했던 것이었나, 어느 영화의 한 장면이었던 게 아닐까. 정말 자신이 김예빈을 사랑했던 건가 사랑하지 않았던 건가. 그것은 진짜였던 건가, 거짓이었던 건가. 어쩌면 남들 말대로 모두 자신의 착각이었던 걸까. 자신의 머리가 돌아버려 망상을 해대고 있었던 건지. 남자가 떠나면 아무것도 안 하고 술만 마실 거라고 으름장을 놓던 김예빈은 주요 배역으로 헐리웃 진출을 앞두고 있었다. 유부남과 사랑에 빠져 자기의 모든 것을 버리고야 마는 비운의 입양아 역할을 맡는다고 한다. 문밖에서 음식을 만드는 소리, 아내의 말소리, 이제 막 하와이에서 돌아와 캠프의 경험을 재잘대는 딸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남자는 문을 열여다 그 자리에 멈췄다. 문을 열었을 때 저들마저 사라지면 자신에겐 남은 것이 정말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김예빈이 가짜였다면 지금 이 삶은 진짜일까? 그는 자신을 부르는 딸의 목소리에도 쉬이 대답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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